정채봉님과 류시화님이 엮은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시인으로 키우셨다.
     시를 통하여 인간의 인내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고
     자연과 인생의 비밀을 엿볼 수 있게 해주셨다.
     지금 가난한 어머니의 시작(詩作) 노트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어머니 또한 더 이상 시를 쓰는 어머니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부뚜막에 있던 어머니의 그 시작 노트가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것은 아마 아들인 내가 바로 어머니의 시작 노트이며
     어머니가 평생을 두고 쓴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바로 어머니의 시작(詩作) 노트"라는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표현하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위 구절은 시적이다 못해 영혼의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절대적 가치를 지닙니다. 어머니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나의 인간됨의 밑바탕에 늘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시집詩集중에 문학사상사에서 발간發刊한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2'가 있습니다.
  이 시집은 시리즈series로 나온 3권中에 두 번째 권입니다.

  서점에서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아름다운 언어의 성찬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물질문명이 끝없이 발전하는 하루 하루의 삶에서 마음 깊은 곳에 한 편의 애송시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삶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는 가장 잘 정제된 언어로 이루어진다고들 합니다. 언어를 가다듬는 일은 심성을 가다듬는 일이라고도 합니다. 거칠어진 언어를 가다듬고,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시 읽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는 인간의 심성 그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유일한 예술적인 형태입니다. 시는 삶의 다양한 경험과 충동에 균형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그것을 애써 찾아 읽는 사람에게만 충만한 기쁨을 주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초월의 힘을 발휘합니다. 시적 생활이라는 것은 시를 통해 정서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프리보드'에 글을 쓸 때 시詩를 자주 쓰는 이유는 시가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으로부터 빚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은 시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시는 마음을 말한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거기서 비롯됩니다. 우리네 삶에도 또한 마찬가지의 원리를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말하자면 마음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이 참다운 삶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시는 그것을 찾는 사람의 곁에만 자리한다고 합니다. 시는 객관적인 현실의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세계 인식을 요구하는 경우에 그 존재 의미가 살아난다고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인간의 영혼을 관찰하고자 할 때에만 시의 의미가 중요시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솔직히 시를 읽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만히 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시가 답답하고 재미없는 읽을거리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서사敍事 문학의 물결을 즐기는 사람은 시란 것이 정말 시시한 말장난으로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 읽기는 조금은 인내력을 지닌 사람에게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인내력이 없는 사람이 인내력을 기르는 데에 더 적합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시라는 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담을 쌓는 사람도 많지만, 시는 자꾸 읽어야만 가까워집니다. 처음부터 무엇을 알아내려고 고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시의 언어적 행간行間을 따라 읽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자꾸 읽어 나가다 보면 시의 구절을 저절로 욀 수 있게 되고, 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저절로 그 뜻이 마음속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소설처럼 오랜 시간을 읽는 데에 투자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장의 책상 한구석에 자기가 사온 시집을 놓아두고 잠깐씩 틈을 내어 한두 편씩 읽어도 되고, 호주머니에 시집을 넣고 다니면서 전철에서 꺼내 보아도 됩니다. 소설처럼 앞에서 읽은 대목의 줄거리를 다시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시를 읽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롭습니다.

  시는 가장 잘 정제된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언어를 가다듬는 일은 심성을 가다듬는 일과 서로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어느 시대이건 문화의 창조력은 언어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詩입니다. 거칠어진 언어를 가다듬고,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시 읽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집의 본문을 약간 적자면...

  Page 24∼28

     눈부처 -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의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1월을 저는 '신의 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달인 것도 그렇고 파랗게 여문 청랑晴朗한 하늘표정 또한 그렇습니다.

  잎을 남김없이 모두 지운 나무들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 하며 밤하늘의 별들이 또록또록히 눈을 밝히고 있는 것도 범상치 않은 표정이지요.

  엄동이긴 하지만 청랑한 기운이 있어 감히 수작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기품이 있는 달. 그러기에 노인들의 눈동자조차도 밝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기품 있는 1월이 좋습니다.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칼바람이 목덜미를 휘감아도 '누가 항복할 줄 알어'하며 목을 곧추세우고 걷는 걸음에는 투지가 있지 않던가요? 포장마차에서 마신 소주 몇 잔으로 엄동을 다스리는 가난이 위대해 보이는 것도 역설이기는 합니다만 이 계절의 힘입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만 언젠가 산사에 들렀을 때 노스님이 볕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서 내의를 뒤적이고 있어 무엇하고 계시냐고 했더니 이를 잡고 있다고 하더군요. 한쪽에서는 깎은 머리가 파아래 보이는 사미승이 깨어진 바가지를 깁고 있었고요. 이런 청빈淸貧의 모습이 돋보이는 것도 이 계절의 힘 아니겠습니까?

  첫 아이를 얻었을 적의 일입니다. 점심나절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해의 첫눈이.

  저는 문득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볼 아기한테의 첫눈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두말 않고 조퇴를 신청해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단걸음에 집으로 가니 아기는 세상 모르고 포대기 속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고, 아기 엄마는 김장을 한다고 배추와 무를 간에 절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기 엄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기를 흔들어서 아기의 잠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내 아기가 그 까만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방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기가 듣건 말건 말하였습니다. '자, 봐라. 이것이 이 세상의 눈이라는 거다.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하얗니? 어디 한번 맞아 볼래?'

  저는 아기를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첫눈이 이 세상 첫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던 중 새삼스럽게 아기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흑진주라는 것을 저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아기의 눈동자처럼 맑고 빛나는 흑진주는 없을 것입니다. 헌데 그 흑진주 속에 들어 있는 동그란 점 같은 나의 상반신.

  저는 문득 아기의 천진무구한 눈동자 바다에서 때묻은 아버지의 모습이 멱을 감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아, 그것은 환희였습니다.

  내가 당신과 눈싸움을 하자고 한 적이 있지요? 그것은 어렸을 적에 동무들과 곧잘 벌였던 눈싸움의 복습이라기보다는 내 모습이 당신의 눈동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맑은 눈동자 속에 자신이 담겨져 있는 것을 그윽이 바라봄은 행복입니다. 아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자신 있는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 사무실의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다 말고 빙그레 웃으며 구경하는 것조차도 행복한 정경이 있어 마음이 젖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젊은 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연인들처럼 허리가 으스러져라 팔을 감고 가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상대방의 청바지 뒷주머니에 X자로 손을 집어넣고 걸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정경은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며 걸어가기 위해 뒷걸음질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상대를 사랑하면 걸어가는 그 사이에도 얼굴을 마주보며 방글거리고 싶어질까 생각해 보세요.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가요.

  저는 정호승 시인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기를 보다 말고 아기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눈부처'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내게 되었노라고.

  곧 눈부처라는 말은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 동인, 동자라는 뜻이라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또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 있는 부처'로 표현한 선인의 아름다운 마음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정호승 시인은 고백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세상의 바다보다 더 넓고 바다보다 더 깊은 데가 눈동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담고, 바다를 담을 수 있는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겨울, 이 1월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윽이 들여다보는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이웃 중의 하나이고 싶습니다. 촛불 밝혀진 탁자 건너편의 당신의 눈동자 속에 든 저의 눈부처, 그것은 틀림없는 행복입니다.

  위의 글은 작년 1월에 돌아가신 고故 정채봉님이 쓰신 글입니다.
  님 자신이 기품 있고 '신의 달'이라고 말하신 1월에 돌아가셨으니 어쩌면 이 분은 참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별이 잘 안보입니다.
  저도 '유진'처럼 '준상'이 가르쳐 준 '폴라리스'를 찾아보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자기 전에 친구에게 편지 한 통을 적어야겠습니다.
  일본으로 '소믈리에' 공부하러 간 친구인데, 조만간 한 번 볼 수 있을 거 같다고... 말입니다.

  아침에 나갈 때 날씨가 좋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 옆에 앉는 여자후배의 표정 날씨도 좋았으면 합니다.
  그럼... 편안하고 포근한 밤 되세요.


댓글 '2'

Hiya♡

2002.03.25 00:16:27

이것.쓰시느라구.고생하셨어요^ ^...진짜.힘드셔께당....

토미

2002.03.25 00:19:29

조금이요... 그래도 올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참 빨리 읽으셨네요... 그리고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전 ID를 처음 보는 거 같거든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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