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회 수 3042 2002.03.29 22:50:10
토미
  요즘 제가 읽은 책이 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그 책입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하면 잘 모르실 분이 있겠지만, <좀머씨 이야기>의 저자著者라면 이름만이라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주인공 '그르누이'는 1738년 한여름 파리의 음습하고 악취 나는 생선 좌판대 밑에서 매독에 걸린 젊은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납니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생선내장과 함께 쓰레기더미에 버려지나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대신 그의 어머니는 영아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로부터 '그르누이'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는 여러 유모의 손을 거쳐 자라게 되는데, 지나치리 만큼 탐욕스럽게 젖을 빨고,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냄새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가 그 아이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르누이' 자신은 아무런 냄새가 없으면서도 이 세상 온갖 냄새에 비상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는 어두운 곳에서조차 냄새만을 추적하여 목표물을 정확히 찾아내기도 합니다.

  무두장이 밑에서 일하던 어느 날, 미세한 향기에 이끌려 그 황홀한 향기의 진원인 한 처녀를 찾아냅니다. 그는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는 그 향기를 자신의 것으로 취합니다. 그의 첫 번째 살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파리의 향수제조인 '발디니'의 도제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최대 목표가 세상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그는 끊임없이 매혹적인 향수를 개발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일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악취로 가득한 도시 파리를 떠나 산 속의 외진 동굴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며 살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7년 만에 그는 다시 인간세상으로 나옵니다.

  이번엔 향수를 제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도시 <그라스>로 간 그는 이제 <인간의 냄새>를 만드는 일에 전념합니다. 물론 그의 목표는 지상 최고의 향수, 즉 사람들의 사랑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러한 향기를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그를 위해 그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밉니다. 그로부터 <그라스>에서는 원인 모를 연속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은 이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여자들로 모두 머리칼이 잘린 채 나신으로 발견됩니다. 온 도시는 공포의 도가니가 됩니다. 스물 다섯 번째 목표인,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기가 나는 소녀를 취하고 나서 결국 그는 체포됩니다.

  그의 처형이 이루어지는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광장에 나타나자마자 광포해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아지경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르누이'가 지금껏 죽였던 스물 다섯 여인에게서 체취한 향기로 만든 향수를 바르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면했지만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자신이 만든 향수로 인해 욕정에 사로잡혀 살인광인 자신에게 사랑과 바보 같은 존경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도시를 떠나 그가 살았던 파리로, 파리 이노셍 묘지의 납골당으로 갑니다. 부랑자들 틈에 섞여 든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향수를 온몸에 뿌립니다. 그러자 그 향기에 이끌린 부랑자들은 '그르누이'에게 달려듭니다. 알 수 없는 사랑의 향기에 취해 그의 육신을 모두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한 제 느낌을 적자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어서 굉장히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엽기적인 살인범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오로지 냄새에만 집착하는 외골수형 인간이.

  정작 자신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추한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도 알 수 없는 사생아에, 남보다 못한 외모와 아웃사이더의 성격. 그리고 보통의 사람에게 나는 냄새가 안 나는 그루누이. 자신은 냄새가 없으면서도 누구보다 예민한 코를 가졌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얻으려고 집착합니다. 물론 살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美의 전형을 '시각'에서 '후각'으로 전환해서 생각한 것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향수'에서 무슨 영감이 떠올라서 향수를 글감으로 장편소설까지 쓸 수 있나 궁금했는데, 정말 장편 소설이 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름 한 철 울어대고 죽어버린다는 매미가 땅 속에서 애벌레 상태로 7년 동안 있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인공인 그루누이도 7년 동안 그야말로 애벌레 같은 상태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 못할 상태로 깊은 산 속의 동굴에서 칩거하는 시절을 보냅니다.

  '자기 자신의 냄새를 찾아서'... 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맙니다. 좀 비약하면, 자신의 내면에 이르는 구원은 발견하지 못한 듯 합니다. 칩거 생활 후,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엉터리 과학자 흉내를 내는 후작의 손에 이끌려 비둘기 스프도 먹고 환기법이라는 치료도 받습니다. 길던 머리와 손톱도 손질하고 새 옷도 입고 대중 앞에 나서니 사람들이 그 치료법이 효과 있다고 다들 아우성. 그 때 작가 파트리크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비둘기 수프나 환기법이 아니라 단지 옷가지 몇 벌과 이발, 그리고 얼굴에 바른 화장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옷이나 악세사리 몇 개로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때로는 눈에 보이는 몇 가지로 얼마나 쉽게 판단을 내리며 사는지.

  자신에게서는 도저히 냄새(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걸 마침내 인정하고 아주 좋은 인간의 냄새를 만들어서 몸에 뿌리고 다닐 결심을 하게 되는 그루누이. 하지만 몸에 뿌린다고 해본들 어차피 그 향기가 완전한 자신의 향기는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일단 소유한 <후> 그것을 상실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해볼 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장 매혹적인 향기를 얻기 위하여 아름다운 소녀들의 목숨 25명을 빼앗은 후, 그 향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때쯤 해서 살인도 덜미가 잡히고 그는 감옥에 갑니다.

  수많은 시민이 모인 가운데 이 공포의 살인범이 공개처형을 위해 등장합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있는데 그는 자신이 만든 너무나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향수를 뿌리고 나타납니다. 결과는...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해서 다들 이 살인범을 숭배하고 좋아하게 됩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단지 그 향수에 홀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연출한 분위기만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향기의 가면, 도둑질한 향기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향기에 속아서 살인범이라는 사실도 잊고 자신을 숭배하는 대중을 비웃는 그루누이.

  '그는 인생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살인범인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자신을 처형하기를 바라는 그루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 한 번만, 꼭 한 번만이라도 그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다.'

  작가 파트리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들이 각자 쓰고 사는 가면에 대한 통찰과 '나의 진짜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하는 화두에 이르기까지 사색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책이었습니다.

  '박노해'의 <겨울이 꽃핀다>中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야 아빠다
     달려와 안기던 딸아이가
     아유 냄새
     이쁜 얼굴 찡그리며 고갤 돌린다.

     솔아 니 유아원에도 보내고
     컴퓨터도 사줄라꼬
     회사에서 일한 아빠 향기잖아
     까끄런 내 입맞춤에 찡그리며 웃는다

     솔아 훗날 너는 알게 되리라
     온몸에 배인 이 아빠의 냄새를
     이 기름 냄새의 설움과 아픔을
     이 기름 향기의 깨끗한 가치를

  냄새는 곧 직업입니다. 그 사람의 취향이며 품격이고 인생입니다. 꽃밭에 가면 꽃 냄새, 된장국을 먹으면 된장 냄새, 냄새는 먹은 대로 발 가는 대로 따라다닙니다. 슬쩍 고개 돌릴 때 귓볼 안 머리칼에서 풍기는 여인의 은은한 향수는 남자의 심장 박동을 자극하지만, 지독한 향수나 술과 담배로 절은 입 냄새는 악취일 뿐입니다. 냄새도 향기도 자신의 창조물創造物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냄새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스타지우에 오시는 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쉬세요.

댓글 '3'

동이

2002.03.29 23:18:27

전 예전에 "좀머씨 이야기"만 읽었는데...

★벼리★

2002.03.30 01:17:16

저 이책 중2때 읽었었어용..ㅋㅋ

jeehee

2002.03.30 09:26:53

향수 한 4-5년 전에 읽었어요..제가 냄새에 좀 민감하거든요..읽는 내내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지금도 그 생각이 나네요..토미님 책 많이 읽나봐요..저도 책 좋아하는데..매번 글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님이 넘 존경스러워요..언제 한번 답글 드리려고 했는데..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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