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면...

조회 수 3108 2002.04.16 06:58:30
토미
     '오토는 앞으로 선생님의 허락 없이 휠체어를 타서는 안된다.'
     다카기 선생님으로부터 휠체어 사용을 금지당했다.
     아주 가혹한 지시였다. 엉덩이를 땅바닥에 철썩 붙이고 걷는 내게 있어
     여름의 뜨거운 지열과 겨울의 차가운 기운은 끔찍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카기 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오토가 어리니까 사람들이 가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립을 해야 한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아이 매 한대 더 때린다'는 말이 있다.
     다카기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 말의 깊은 의미를 뼛속 깊이 느낄 수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꿀꿀한 기분에 김치전을 먹고 싶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재즈를 틀어놓고 사색에 잠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그럴 때면 생각나는 책冊도 있습니다.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이 지은 <오체 불만족五體 不滿足>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소개하자면...

  수많은 차들이 떨어질 신호를 기다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을 것 같은 도심의 횡단보도 한복판. 반 팔 파란 셔츠를 입은 한 소년이 있습니다. 팔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리도 역시. 선반 위에 올려진 석고상처럼 기괴한 휠체어에 그저 덩그러니 올려져 있습니다. 휠체어는 고장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저쪽 모퉁이에서 언제고 트럭 하나가 굉음과 함께 달려 들어올 지도. 그러나... 소년은 웃고 있습니다. 제가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그늘 하나 없는 찬란한 봄볕 같은 웃음을 말입니다.

  <오체 불만족>은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사지절단증'이라는 기괴한 병에 걸린 채 세상에 태어난 이 책의 지은이 오토는 그러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초개성적超個性的'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담담히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가슴 울컥거리는 눈물이 아니라 빙그레 그려지는 흐뭇한 웃음으로 다가옵니다. 눈물보다 더 잔잔히, 온 마음으로 퍼져가는 그런 동그라미같은 웃음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오토가 아니라 그의 가족, 친구, 선생님들입니다. 동정과 보호가 아니라 "오토와 함께 하고 싶어서 함께 할 수 있는 룰을 만들어 가는" 따뜻하지만 현명한 그들의 배려가 웃고 선 오늘의 오토를 살붙여 왔을 것입니다. 함께 하고 서로 나누는 삶의 테두리 속으로 기꺼이 장애인을 보듬어 안는 그들의 모습이 부럽고 아름답습니다.

  삶에 지쳐 주저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절망에 고개 파묻은 모든 이들에게 오토는 웃으라고 말하는 거 같습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저앉은 그 절망의 높이보다 더 낮은 높이에서 오토는 지금껏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과 부대껴 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보듬어 안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오토는 말하고 있습니다. 15cm의 팔로도 기꺼이 다른 이들을 보듬을 수 있다고...

  아주 옛날,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였다고 합니다.
  전 사진 속 오토의 눈을 보며, 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과연 오토만큼 환히 웃고 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사람이 발이 하나밖에 없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냐는 말에 중국의 한 현인은 이렇게 말했다.
     "날 때부터 그런 것이라면 무에 이상할 게 있겠소?"

  본문의 일부를 적자면... 솔직히 이 책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별로 점수를 매기자면 별 다섯 개를 주어도 부족할 정도로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머리말

  1976년 4월 6일. 활짝 피어난 벚꽃 위로 다가선 부드러운 햇살. 정말 따사로운 하루였다. '응애! 응애!' 불에 데여 놀란 것처럼 울어대며 한 아이가 갓 태어났다. 건강한 사내아이였고 평범한 부부의 평범한 출산이었다. 단 한 가지, 그 사내아이에게 팔과 다리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선천성 사지절단. 쉽게 말해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는 장애아'였다. 출산과정에서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떠들썩하게 문제가 되었던 살리드마이드를 잘못 복용해서 생겨난 결과도 아니었다.

  원인은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나는 초개성적인 모습으로 태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하다니, 그건 나말고는 복숭아에서 태어난 동화의 주인공 '모모타로'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정상적인 출산이었다면 감동적인 모자상봉의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산의 고통에서 벗어난 산모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될 것을 염려한 병원 측에서 '황달이 심하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어머니와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는 정말 태평한 분이다. 아무리 황달이 심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식을 한 달 동안이나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도 '아, 그래요'라며 그냥 넘어가다니. 그 때까지 아들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어머니는 '초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모자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 날 병원으로 오던 중에야 비로소 내가 황달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마 팔과 다리가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그냥 몸에 약간의 이상이 있다고만 했다. 일단은 직접 만나보게 한 후에 사태를 수습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어머니가 날 보는 순간 기절할 것에 대비해서 병실까지 준비해 두었다. 아버지와 병원, 그리고 어머니를 둘러싼 긴장감은 그렇게 높아만 갔다.

  그러나 '모자 상봉의 그 순간'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 대성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을 염려한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마디였다. 비록 팔과 다리는 없었지만 배 아파 낳은 아들, 한 달이나 만날 수 없었던 아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 더 컸던 것이다.

  이렇게 성공적인 '모자간의 첫 대면'은 곁에서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감동 그 이상으로 내게는 큰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받았던 첫인상의 기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먼 훗날까지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모자간의 첫 대면이라면 그 중요성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랬다. 어머니가 나를 만나 처음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생후 1개월,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것

  챔피언은 항상 내 차지였다. 그런데 늘 2등 자리에서 나를 넘보는 아이가 있었다. 그 라이벌은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수재. 느긋한 말투에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는 아이였지만, 작정하고 말문을 열면 여학생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가 세서 남자아이들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어느 날 그 여자애가 나에게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번 시험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어쩌면 오카 선생님으로부터 '일등을 오토에게만 맡겨 놓을 거니?' 하는 부추기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는 나 또한 만만치는 않다. 당연히 맞받아쳤다. '글쎄, 다음에도 챔피언은 내 차지일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될걸. 난 오토 너에게는 뭐든지 이긴 자신이 있어.' '흐음, 그래?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을 텐데...' '뭐, 뭐라고? 공부라면 나도 너한테 지지 않아.'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래애? 그게 뭔데?'

  '봐, 나한테는 팔다리가 없잖아.'

  결코 홧김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없기 때문에 바로 나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흉내낼 수 없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무렵 국어시간에 '특징(特徵)'과 '특장(特長)'에 대해서 배웠다. '특징'이란 다른 것과 비교해 특히 두드러지는 점을 말한다. 그에 비해 '특장'은 그 무엇을 특징지을 수 있는 장점을 가리킨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는 자기소개서에 '特徵-손과 발이 없는 것'이라고 쓰던 것을 '特長'이라고 고쳐 썼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特長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손과 발이 없다는 것. 그 여자아이는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내가 한 말을 이해해 주었다.

  님들은 느낌이 어떠십니까...

  최인호의 <상도(商道) 1>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인 것이다."

     "작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큰 장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다." 또 말합니다. "장사를 상술이나 기술에만 의존하려 해서는 안된다."
  최인호씨는 이 작품을 통하여 사람을 얻는 것이 최고의 큰 장사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가 필요한 하루가 될 거 같습니다.
  오늘도 님들의 하루가 다른 이들에게 눈물보다 더 잔잔히, 온 마음으로 퍼져 가는 동그라미같은 웃음을 주는 하루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그리고 사람을 얻는 하루가 되세요.


댓글 '2'

세실

2002.04.16 09:09:43

오토다케의 오체불만족..전 그 책을 읽으며 오토다케를 있게한 그 토양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누구나 놀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상봉을 미루었는데" 어머 귀여운 우리 아가..." 바로 이 한마디가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미님 행복한 날 되세요.^^

하얀사랑

2002.04.16 20:33:42

와~ 사랑이가 읽은책두 오늘은 나왔네요^^ 토미님 세실님 행복한 일만 가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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