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心의 선물...

조회 수 3127 2002.04.17 00:24:20
토미
  열: 호두, 땅콩 그리고 망치
  "달구경 한번 와라. 보름에. 우리 집에."

  지난 겨울, 감기 조심하시라고 안부 차 김재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하신 말씀이다(김선생님은 내가 다니는 치과의 원장님이시다). 그렇지. 조금 있으면 보름이구나. 잘생긴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정월 대보름.

  그 훤한 얼굴을 보며 소원도 빌고 또 맛있는 것도 먹는 날. 나는 그런 정월 대보름이 추석이나 설날보다 더 좋다. 오순도순 식구들끼리 모여 달구경하는 것도 좋고, 바구니 가득 담긴 호두랑 땅콩이랑 탁탁 깨뜨려 먹는 재미도 쏠쏠하고.

  "언니, 치과 선생님이 달구경하러 오래." "그래? 그럼 우리 부럼 선물 해 가지고 가야 되는 거 아니니?" "부럼? 그거 어떻게 가져가면 되는데?" "글쎄... 그냥 달랑 봉지에 담아가기도 그렇고... 생각 좀 해보자, 얘."

  김선생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석화 언니랑 나는 부럼을 어떻게 선물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니도 나도 남들 하는 것처럼 대충 선물하는 건 영 내켜하지 않는 성미여서, 그 날로 우리 둘의 머릿속에는 '부럼'이라는 고민덩이가 들어앉고 말았다.

  부럼이라... 딱딱한 호두와 땅콩을 콱 깨물어 먹는다... 이가 좀 아픈가? 아니야... 그보다는 손이 아픈가? 글쎄, 별로 그렇지도 않고. 한 살이라도 젊은 죄로 나는 석화 언니에게서 '부럼+뭔가 곁들일 것'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열심히 생각했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차가 서면 기름을 채워라. 그리고 아이디어가 바닥나면 생각을 찾아 나서라. 선물에 관한 나의 좌우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동숭동으로 갔다. 그곳에는 내가 곤란지경에 처할 때마다 자주 들르는 철물점이 하나 있다.

  이런저런 물건들이 늘 빼곡이 들어차 있는 곳. 어디에 쓰면 좋을지 모를 줄이며 길다란 꼬챙이, 또는 동글동글한 바퀴 모양의 원이며 너무 작거나 너무 큰 못들까지... 종종 기발한 선물 아이템을 그곳에서 찾았던 나는 그 날도 불쑥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반짝거리는 내 눈이 찾아낸 것은 바로 저 위 선반에 올려져 있는 망치. 옳지, 딱딱한 부럼과 잘생긴 망치라! 선반에는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여러 가지 망치들이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집어들었다.

  자루는 연필만 하고 머리는 지우개 만한 꼬마 망치. 망치라기보다는 예쁜 장난감 같은 그 망치야말로 내가 찾던 부럼의 짝꿍이었다.

  들여다볼수록 맘에 쏙 드는 그 망치를 5개 샀다. 올 정월 대보름에는 이걸로 재미있게 보낼 수 있겠는걸. 신난다. 자, 이제 망치랑 부럼이 들어갈 옷을 준비해야지.

  상자? 바구니? 아니지... 호두와 땅콩을 담으려면 역시 주머니가 낫겠다. 호두랑 땅콩을 먹을 때마다 망치로 내리쳐야 하는데, 그냥 방바닥에다 놓고 내리치면 열에 대여섯 번은 호두가 도망하고 한두 번은 손이 맞는다. 성공률도 높여주고 손도 아프지 않게 하려면 호두 밑에 깔릴 천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괜찮은 주머니가 있다.

  나는 곧 알커피를 담아두는 용도로 쓰는 포대천으로 주머니 5개를 만들었다. 크기는 여러 가지로... 라면봉지 크기 하나, 달걀꾸러미 크기로도 하나. 그리고 더 작은 것도...

  주머니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망치를 다듬는다. 물론 보통 망치가 아니라 '아주 작은' 망치이지만 그대로 선물이 될 수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자루가 까칠까칠했다. 사포로 부드럽게 밀어주고 아크릴 물감으로 무늬 몇 개를 그려 넣었다. 자루 끝에는 칼집을 넣어 평평한 면을 만들고, 날짜와 함께 나와 언니가 드린다는 의미로 이름도 새겨 넣었다. 이렇게 내 손길이 닿아야 선물다운 선물이 된단 말이야.

  주머니 안에 부럼을 채워 넣고 끝을 묶었다. 끝자락을 길게 남긴 다음 그 끝에 망치를 묶어 부럼과 망치를 짝지워주었다. 다 됐다. '좋은 냄새가 나면 더 좋겠다. 계피 스틱이 알맞겠군. 자루랑 색깔이 비슷하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주머니를 묶은 매듭 사이에 계피 스틱을 하나씩 끼워 넣었다. 부럼을 넉넉하게 넣어 불룩해진 자루와 망치 그리고 계피 스틱. 정성에 향기까지 더한 대보름 선물을 보며 나는 이 선물을 받게 될 김선생님의 구수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올 대보름에는 귀밝이술이랑 이 부럼 드시고 더 건강해지셔야 할 텐데... 정성껏 만든 부럼주머니 안에는 그렇게 '건강하세요!'라는 나의 바람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느낌이 좋은 선물이었다. 앞으로는 발렌타인 데이를 챙기기보다 대보름을 챙기는 것이 나에게 더 어울릴 듯 싶었다. 초콜릿을 나누어 먹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오래도록 건강한 그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노영심이 지은 <노영心의 선물>中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읽으시면서 저절로 미소가 나오지 않으십니까...
  외국어학당에 갔다오다가 자선바자회에서 거의 헐값에 그냥 가져오다시피 한 책인데 참 재미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영심'이라는 이름 때문에 구입했지만 말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이 책은 '이런 선물이 좋다'거나 '이런 포장을 해서 주면 좋다'는 식의 아이디어 제안 실용서는 아닙니다. 그저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자신이 했던 흡족한 선물 45가지를 얘기해줄 뿐입니다. 사진도 그녀가 했던 선물의 모양을 짐작해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자그맣게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특별한 날에 뭔가 선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영심의 선물 이야기를 들으면, 무엇보다도, '선물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영심이 말하는 선물은 특별하거나, 비싸거나, 실용적이거나, 예쁜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가수 이문세에게 선물한 코털집게, 여행가는 후배들에게 선물한 필름통으로 만든 양념통, 가수 김창환에게 선물한 책받침을 잘라만든 피크, 한국생활을 새로 시작하는 선배에게 준 비누와 칫솔, 항상 앞머리를 제 손으로 자르는 독특한 친구에게 준 이발가위...

  이런 선물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선물을 받을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늘 마음에 둔 덕분이라고 그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선물 줄 사람을 생각하며 '무엇이면 기뻐할까'를 열심히 궁리하는 것, 그 자체가 선물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기쁨이라고 말입니다.

  가끔은 선물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찾아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어울리는 넥타이와 팬츠는 장난을 받아줄 만한 '터프'한 남자에게, 길쭉한 양초와 꽃을 섞은 특이한 꽃다발은 불쑥 찾아가도 좋아하실 고마운 어른께.

  이 책을 보면 선물뿐만 아니라 따뜻한 쪽지글 남기기도 좋아해서 아예 별명이 '쪽지소녀'라는 노영심의 '선물 제대로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선물에도 A/S가 필요하다는 (예컨대 그와 어울리는 다른 선물을 해 준다거나, 그 선물이 잘 쓰이고 있는지 보고 더 잘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프로정신'까지 말입니다.

  늦은 귀가歸家길에 지하철에서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나는 시詩가 있어 적어봅니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저 혼자만 있는 밤이 되었습니다.
  아니 마음 속에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어떤 때 마치 나는 너인 듯하다
     오랫동안 너를
     그리고 오랫동안 네 소리를 내면서
     그리움도 노래로 하던 적의 시간까지 모두 합하면
     나는 충분히 너가 될 법도 하단 생각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건 상상일 뿐
     그저 이상한 상상일 뿐

     내 평생 동안 널 만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오히려 그래야만 서로 행복한 미소를 꿈꾸다가도
     어느 새 널 만나고 싶은 아주 비현실적인 현실을 꿈꾸다
     오늘도 저문 나의 정원에서
     울게 되었다
     내 평생 동안 너에게 흡족히 보여 줄
     큰 미소 하나 다져 놓았으면 하는 다짐을
     다시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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