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불어주는 피리소리...

조회 수 3055 2002.08.23 01:17:31
토미
     오늘은 천천히 풀꽃들이나 살펴보면서
     문수골 시린 물에 얼굴이나 씻으면서
     더러는 물가에 떨어진 다래도 주워 씹으면서
     좋은 친구 데불고 산에 오른다
     저 바위봉우리 올라도 그만 안 올라도 그만
     가는 데까지 그냥 가다가
     아무데서나 퍼져 앉아버려도 그만
     바위에 드러누워 흰구름 따라 나도 흐르다가
     그냥 내려와도 그만
     친구여 자네 잘하는 풀피리소리 들려주게
     골짜기 벌레들 기어 나와 춤이나 한바탕
     이파리들 잠 깨워 눈 비비는 흔들거림
     눈을 감고 물소리 피리소리 따라 나도 흐르다가
     흐르다가 풀죽어 고개 숙이는 목숨
     천천히 편안하게 산에 오른다
     여기쯤에서
     한번 드넓게 둘러보고 싶다.

  이성부의 시집 <지리산>中에서 골라본 것입니다.
  잘 익은 청포도 맛 같은 우정의 친구와 더불어 천천히 산을 오르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산에는 더 올라도 그만, 안 올라도 그만일 것입니다. 오랜 친구와 푸른 산자락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냥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친구가 불러주는 청아한 풀피리소리까지 산 속에 퍼져 울리니,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입니다.

  그냥 왠지 '80년 광주의 아픔'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이 시인의 시를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 고향사람이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요즘 다시 손에 펴든 책이 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저작들입니다.
  그 중에서 요즘 제가 읽는 책인 '나무야 나무야'中에 나오는 구절을 적어보겠습니다.
  당분간 제 글을 읽는 분들은 신영복 교수님의 글을 매우 자주 보게 될 거 같습니다.

  1995년 11월14일 <얼음골의 스승과 제자>

  이 엽서는 고향의 산기슭에서 띄웁니다.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許浚)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게 하였던 골짜기입니다. 소설 동의보감의 바로 그 얼음골입니다. 깎아지른 병풍절벽으로 둘러싸인 가마볼 계곡에는 이미 어둠이 차 오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은 스승과 그 앞에 꿇어앉은 제자의 모습이 어둠속에서도 보이는 듯 합니다.

  나는 바위너덜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소설 속의 유의태와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나는 허상을 대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닐 지 모르지만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20년의 징역살이와 7년여의 칩거후에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 이곳 얼음골이라는 사실이 내게도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입니다.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권리를 그곳에서는 '독보권'이라 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혼자서 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해방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님에 이어 홀로 남아계시던 아버님마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차라리 허전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 왔습니다.

  오뉴월이 아닌 가마볼 얼음골에는 이미 얼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처절하게 승계하는 현장에서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엄정함 하나만으로도 가슴 넘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배우고 가르치는 이른바 사제의 연쇄를 더듬어 확인하는 일이 곧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중학교때던가 나는 이곳에 아버님을 따라온 적이 있습니다. 여든 일곱에 440여쪽의 책을 출간하시고 여든 여덟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 생각납니다. 아버님은 그 책에서 사람은 그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산의 능선은 물론 나무와 흙빛까지 그토록 친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WTO체제이후 한낱 광고문안으로 왜소화되어버렸지만 어린 시절의 산천이 바로 자신의 정서적 모태가 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산천과 사람, 스승과 제자의 원융(圓融), 이것이 바로 삶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둠에 묻혀 가는 얼음골위로 석양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는 암봉(巖峰)이 문득 허준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승 유의태의 얼굴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동의보감의 찬술을 명한 왕의 교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약재를 자세하게 적어서 지식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병을 고칠 수도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글에 나타난 민족의식과 백성들에 대한 애정은 선조왕의 것이 아니라 허준의 마음이고 허준을 가르친 스승의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의보감의 찬술 자체가 허준의 기획이었고, 허준의 집필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동의보감의 완성은 오로지 허준 혼자만의 외로운 작업이었고 그나마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300년 후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이 나오기까지 우리풍토와 체질에 맞는 유일한 의학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낸 책이었습니다.

  나는 얼음골에 쌓이는 어둠속에 앉아서 한사람의 허준이 있기까지 그의 성장을 위하여 바쳐진 수많은 사람의 애정과 헌신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한 송이의 금빛 국화가 새벽이슬에 맑게 피어나기 위하여 간밤의 무서리가 내리더라는 백거이(白居易)의 시 <국화>가 생각납니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던 노신(魯迅)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자기가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저마다 누군가의 자양이 되는 것을 삶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모(慈母)라 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쇄 가운데에다 자신을 세우기보다는 한 벌의 패션 의상과 화려한 언술(諺述)로 자기를 실현하고 또 자기를 숨기려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입니다. 당신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 합니다. 무수한 상품의 더미와 그 상품들이 만들어내는 미학에 매몰된 채 우리는 다만 껍데기로 만나고 있을 뿐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작 두려운 것은 그러한 껍데기를 양산해내고 있는 삶의 토대와 틀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튿날은 아침 일찍 서둘러 천황산을 올랐습니다.
  아침햇살에 빛나는 단풍숲 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등반의 가장 좋은 점은 혹시 동행인이 재미없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한참동안은 시야에 한 사람도 두지 않고 올라갔습니다.
  해발 1000여m의 사자평에 오르자 무연한 갈대평원이었습니다. 햇빛 달빛만 받으며 수천 수만 날을 피고 진 갈대꽃이 100여만평의 드넓은 평원 가득히 펼쳐져 있고 하얀 갈대꽃 위로 스쳐오는 고원의 바람이 먼저 온몸을 씻어 주었습니다.

  태백산맥이 남으로 달려와 마지막으로 솟은 산이 천황산입니다. 그 정상에 웅거하고 있는 사자바위가 바다건너 일본 천황궁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으로서는 매우 언짢은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쇠말뚝을 꽂아 단혈을 자행했던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천황산'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그들의 휘하로 거느리고 싶었으리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습니다.
  밀양문화원에서는 9월 1일부터 다시 원래의 재약산(載藥山)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더구나 허준과 유의태가 사제관계의 처절한 절정에 도달한 얼음골의 상봉이고 보면 비록 오랜 약초재배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당연한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남대학교의 염무웅교수는 사자평 고원이 고려 때 초적(草賊)의 은거지라는 사실을 기록에 읽었다고 했습니다. 서북쪽은 얼음골의 병풍절벽 윗쪽이어서 천혜의 절벽이고 동남쪽은 석남사와 통도사를 안고 있는 신불산과 영취산으로 둘려있어서 가히 초적의 요새가 될만한 평원이었습니다
  염교수 일행과의 만남은 참으로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옥중에서부터 염무웅교수의 평론을 애독해 왔습니다만 일면식이 없었던 까닭에 수미봉 기슭에 이르기까지 아마 서너 번을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면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수비봉 아래에 다리쉼을 하고 있던 염교수 일행이 지팡이 하나로 혼자 지나가는 이미 구면(?)이 된 나를 아마 측은하게 보았던지 점심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산길은 진불암을 거쳐 표충사 뒷편으로 내려왔습니다.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충훈을 기리는 사찰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단청이 사명대사의 풍모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더구나 사자평 갈대바람으로 온몸을 씻은 감회를 좀더 오래 아끼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충무공을 비롯하여 곽재우, 김덕령 등 절세의 용재들마저 터무니없는 역모를 쓰고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당파싸움의 와중에서도 사명대사는 명리를 뜬 구름으로 여기며 지팡이 하나로 돌아간 산승이었습니다.

  고매한 도덕적 언어들이 수천억원의 부정한 축재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 위선의 계절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가르치고 무엇으로 배우는가하는 생각이 얼음골의 차거운 교훈으로 남습니다.
  알튀세르는 연극이란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람을 완성하기 위해, 삶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그 미완성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배우의 생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대위를 걷든, 객석에 않아 있든, 어차피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저마다 그 미완성의 의미를, 그 침묵과 담론의 완성을 천착해가는 사람들속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화사한 언어의 요설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앞뒤좌우에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써 깨닫고, 삶으로써 가르칠 뿐이라 믿습니다.
  여느 해보다 청명하고 길었던 가을이 끝나고 있습니다. 등뒤에 겨울을 데리고 있어서 가을을 즐기지 못한다던 당신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제는 집에도 못 들어오고 사무실에서 밤새 법전과 사전을 뒤져가며, 서류를 작성하였더니 몸이 좀 무겁습니다... 그리고 전에 sunny지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호흡기가 약한 탓인지 또 코가 맹맹하고 목이 간질간질합니다. 아무래도 따뜻한 우유 한 잔 데워서 마시고 자야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편히 쉬세요.


댓글 '5'

박혜경

2002.08.23 02:16:35

아는 분이 이번에 지리산 다녀오셨는데 넘 좋다구 하셔서 저두 한번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토미님의 글을 읽으며 ...지리산을 오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네요 건강조심하시구 푹 주무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앨리럽지우

2002.08.23 14:44:18

토미님 글을 읽으니.. 산속에 올라와서..잠시 쉬려고 앉아있는거 같네요~ 토미님 올려주시는 글에.. 답글 다는거.. 오랜만이죠?.. 그동안 안녕하셨죠? 밤샘 근무하시나봐요.. 요새 밤공기가 차던데.. 늘 건강하시길~

sunny지우

2002.08.23 15:09:10

신영복 교수님 필체가 참 단아하고 정갈하군요. 사람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말 뇌리에 남습니다. 산은 포용력이 있다는데 ... 정말 산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번 겨울에는 기침으로 토미님이 고생안하셨으면 해요. 꿀에 잰 배즙이 기침에 좋다던데...빨랑 장가드셔서 색시에게 해달라하세요.

세실

2002.08.23 16:00:20

오랫만에 토미님 글에 꼬리 한번 달아봅니다. 자기전에 따뜻한 우유 한잔 좋죠. 전 요즘 우리 마을 뒤산에 오른답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제법 우거진 산인데..별로 힘들이지않고 산림욕하기에 그만이네요. 내일은 아마 영취산 신불산 가지산 영남 알프스라고 부르죠. 그 산자락에 자리잡은 통도사랑 석남사 운문사를 거쳐 경주로 갈 예정입니다. 딸내미 방학숙제 핑계로 가족여행 한번 하는거죠. 토미님 넘 무리하지말고 한템포 쉬었다가기^^

김문형

2002.08.23 21:53:27

토미닌. 저도 오랜만이죠? 잘지내고 계신가요? 이제 더위도 물러나려나 봅니다. 이번 여름은 비에 모두가 질려버린거 같아요. 항상 토미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건강하신가요? 건강이 최고인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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