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이 쓰는 일곱 번째 글...

조회 수 3144 2002.11.21 20:28:04
토미
  인디언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면서 나의 슬픔을 진정으로 등에 짐 지어 줄 사람... 만나기는 참 힘이 듭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걱정근심, 절망, 교만, 슬픔, 두려움 같은 짐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국화빵 천원어치를 달라고 하고는 안경 낀 사내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내는 추위에 손이 곱았는지 더듬거리는 손으로 빵틀에서 국화빵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종이봉지에 담다가 국화빵 하나를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국화빵이 꼭 사내의 눈물처럼 보였으며,
     국화빵을 들어낸 빵틀의 빈자리 또한 사내의 눈물자국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나는 이제 거리에서 파는 음식들,
     강원도 감자떡이나 중국식 호떡이나 붕어빵,
     잉어빵, 오뎅, 만두, 호두과자 등을 가끔 사먹는다.
     그것이 그나마 빈곤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호승'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中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누구에게나 빈곤의 추억이 있습니다... 춥고 배고팠던 고통의 시절이 있습니다.
  제 부모님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세월이 흘러, 이제 빈곤의 추억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모질게 추웠기 때문에 더 따뜻했던 사랑의 추억이며, 절망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에 더욱 무한대로 솟구쳐 오를 수 있었던 희망의 추억일 것입니다.
  국화빵의 따스함처럼 말입니다...

  어제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이 끝나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사무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이 난 이야기가 있어 적어봅니다.
  '이철환'의 <연탄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향기

  어둠은 바람을 몰고 와 잿빛 저녁하늘을 몰아내고 있었다. 곧이어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메마른 도시를 촉촉이 적셔놓았다.

  원영 씨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아버지의 광고회사를 물려받아 사회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잡은 30대 사장이었다.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 친구가 말했다.
  "원영아, 나 죽는 줄 알았다. 광고 하나 따내는 데 어찌나 애를 먹이던지 아주 혼났다."
  "일은 얻어냈어?"
  "너무 까다롭게 굴기에 중간 실무자한테 돈 좀 찔러줬지, 뭐. 그랬더니 자동이야, 자동."
  "잘 됐다, 요즘 경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사람 속을 태우더니, 허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잖아, 안 그래?"
  "있으면 나쁠 거야 없지 뭐…. 그래도 돈이 인간의 마음이 될 수는 없잖아."
  원영 씨는 기세등등한 친구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세상에 돈 싫다는 놈 없잖아.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 그래. 돈만 있으면 사람의 마음까지 살 수 있잖아. 돈 있어야 부모도 대접받고, 친구도 있는 세상 아닌가?"
  원영 씨는 돈과 우정까지 결부시키고 있는 친구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잠자코 있자니 변두리 셋방살이를 하고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생각은 좀 달라. 정근아, 내 말을 언짢게 듣지는 마라. 나라가 어려웠을 때, 그래도 돕겠다고 금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을 봐라. 서민들이 장롱 속의 아기 돌반지까지 들고나올 때, 돈 있는 사람들의 금덩어리는 눈감고 귀막고 꼭꼭 숨어 있었다잖아."
  "만일 돌반지가 아니라 금괴였다면 그 사람들도 그렇게 쉽게 들고 나왔을까?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됐다, 그만두자. 생각이 서로 다를 수도 있지 뭐."

  더 이상 말하면 언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원영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을 나오자마자 친구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정근아, 너 많이 취한 거 같으니까 같이 가자. 화장실이 이 층이라 위험해."
  "아니야. 나 취하지 않았어. 이 정도로 내가 취하냐?"
  친구는 막무가내로 원형 씨 손을 뿌리치고는 혼자 계단을 올라갔다. 망가진 그네처럼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두운 이 층 통로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만 중심을 잃어 굴러 떨어지고 만 것이다. 친구 얼굴엔 붉은 산호초가 피어난 것처럼 여러 갈래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욱이 다리까지 심하게 절고 있었다.

  "거 봐, 내가 뭐랬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어두워서 계단이 잘 안 보였어."
  원영 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친구를 나무라며 손수건으로 머리의 상처 부위를 감쌌다. 그리고 친구를 부축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었지만, 여러 대의 택시가 그들 앞에 멈추려다가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태운다면, 요금보다 시트 세탁비가 더 들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택시요금을 두 배, 네 배로 준다고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원영 씨는 급한 마음에 119에 전화했다. 바로 그때, 흰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그들 앞에 멈췄다. 젊은 남자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많이 다치신 거 같은데, 어서 타세요. 근처 병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친절에 그들은 몇 번이고 머리 숙여 고맙다는 말을 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친구는 오른쪽 다리에 깁스까지 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이만 하기 다행이야. 하나님이 도우셨지."
  "그러게나 말야.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그런데 그 사람 연락처라도 알아놓지 그랬어?"
  "참 고마운 사람이야. 근데 우리 내려주고 바로 갔어. 중요한 약속에 늦었다면서……."
  "어떻게든 사례를 하는 게 도린데. 어쩌지?"
  친구는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근아, 너무 아쉬워하지 마, 그 사람이 사례를 바라고 우릴 태워준 거 아닐 테니까."
  원영 씨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친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정근아, 아까 네가 그랬잖아. 돈만 있으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다고. 근데 피투성이가 된 너를 병원까지 데리고 온 건 돈이 아니었잖아.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지."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얼굴엔 여느 때와 다른 밝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신문에서 돈 때문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보았습니다.
  어쩌면 위에 나오는 '창근'의 말처럼 돈이 있다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이 생각도 모순인 것이 전 아직까지 부지런한 부모님 탓에 절대빈곤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돈 때문에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러 경로로 듣는 간접지식과 간접체험으로 이해한다는 것 밖에...

  밖이 무척 춥습니다.
  손이 시리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모두 따스한 저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쉬세요.


댓글 '6'

코스

2002.11.21 21:19:38

'친구'란 인디언 들이 뜻말을 알게 돼면서 '친구'라는 말을 그냥 쉽게 흔하게 넘기게 안돼드라구요. 그 숨은 의미를 알게 된 뒤로 나 자신을 헤아려 보게 돼더군요.서로 실망시키지 않는 것에서 우정을 발견하게 돼며 참 사랑을 발견 하게 하기도 하겠죠. 토미님...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_^

꿈꾸는요셉

2002.11.21 21:56:19

토미님.. 자주 뵈니 참 좋아요... 일상에서 무심히 자나쳐 버릴 수 있는 소중한 것 들을 생각하게 해 주는 님의 글... 웃묵에 놓인 화롯불 같단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친구" 로서의 자세... 내가 먼저 갖출 수 있어야 겠죠!

안개꽃

2002.11.22 00:29:30

예전에는 길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아저씨들을 뵈면, 무서운 마음을 먼저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연탄길을 읽고 많이 달라졌더랬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더 바라보게 되었어요. 나 또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등지고 살 수 있다라는것을요. 내 이웃이 될 수도 있구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맞이꽃

2002.11.22 08:11:30

프리젠테이션 잘 하셨나요 ?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참 좋아요 ..토미님 날씨가 많이 춥죠. 건강조심하시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바다보물

2002.11.22 09:44:01

연탄길이라는 책 읽으면서 그래도 따뜻한 세상이네 했지요 반성도 하고....토미님 피치대 개봉일날 만날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날은 많은 가족들이 참석 해야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찔레꽃

2002.11.22 17:57:02

정말..보상을 바라지 않고 귀한 일 하시는 분들이 있어 그나마 사회 유지가 되고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많이 생각케하는 님의 글 잘 읽구 갑니다...편안한 저녁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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