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6] 녹차향

조회 수 3116 2003.05.21 07:05:52
소리샘


숨이 막혔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뒤에도.. 차를 운전하면서도 상혁인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소리라도 질렀으면..
상혁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난 다 견딜 수 있고.. 용서를 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침묵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안의 고요함은 내 숨을 턱턱 조여왔다.
[상혁아.. 무슨 말이라도 좀 해.. ]
[할 말 없어. ]
[너 할 말 있잖아.. 차라리 화를 내.. 제발.. ]
상혁인 거칠게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갑게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 나 화가 나.. 내가 왜 화가 난 것 같니? 니가 거짓말해서? 이민형씨와 일 한다는 얘길 숨겨서?
아니.. 내가 화가 나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아직도 흔들리는 니 마음이야.
이민형씨 보면서 준상이 생각한 거잖아. 그래서 나한테 말못한 거잖아.. 아니야? ]
[아니야.. 그게 아니야.. 상혁아. ]
[그럼 왜 말을 못한 거야?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언제까지 내가 모를 꺼라 생각했어? ]
[말하려고 했었어.. 다.. 말하려고 했는데.. ]
내가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였다.
이 말을.. 상혁이가 어떻게 믿어줄 수 있겠어..
그동안 상혁이가 숨기는 거 없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었는데.. 그런 거 없다고 뻔뻔스레 거짓말을 해놓고..

서로 말없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상혁이의 일그러졌던 얼굴은 어느덧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간 마음이 가라앉자.. 이제야 상혁이에게 솔직해 질 수 있었다.
[상혁아.. 나 정말 너한테 미안하단 말도 무안하고 미안해서 더 이상 못하겠어.
그래.. 나 너한테 그 사람 얘기.. 말하고 싶지 않았나 봐..
그 사람 보는 거.. 슬펐지만.. 그래도 좋았어. 준상이 아닌 거 아는데.. 다른 사람인데..
그치만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내 앞에서 살아서 말하고 웃잖아.. 살아.. 있잖아..
나.. 그 사람.. 계속 보고 싶었나봐..
미안해 상혁아.. 정말.. 미안해.. ]
[나.. 쭉 생각해 봤어.. 내가 너라면 어땠을까..
아마 나라도 쉽게 말하지 못 했을꺼야.. 더군다나 그런 얘기 나한테 하는 건 더 힘들었을 꺼야.. ]
[미안해.. 상혁아.. ]
상혁인 날 가만히 안아주었다.
[나도 미안해.. ]

이렇게 내 마음을 이해 해주는 상혁이가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이런 상혁일 두고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죄책감이 가슴을 죄어왔다.
이젠 상혁이만을 생각해도 될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가..
상혁인 아직도 내 마음에 준상이를 담고 있는 것까지 이해하고.. 또 기다려 주었는데..
난 도대체 상혁일 위해서 뭘 했었는지..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날 사랑해주는 상혁이가 있는데... 바보 같이..
미안해 상혁아.. 잠시 내가 어떻게 됐었나봐..
준상이와 너무 닮은 그 사람을 보고 너무 놀라서.. 그래.. 잠시 흔들렸던 것 뿐이야..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은.. 너 하나 인데.. 너 뿐 인데..

[유진아.. ]
[응? ]
[너. 그 일 해.. ]
상혁이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혁이가 그 일을 계속 하라고 말하다니..
[아니야.. 그만 두는게 좋아. 그렇게 할래. ]
[그 사람.. 준상이가 아니잖아.
니가 힘들게 준비해온 일인데 여기서 그만둘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이란 거.. 같이 일 하면서 확인해.
여기서 그만 두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난 자신 있다구.. 무슨 말인지 알지? ]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상혁이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며 오랜만에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상혁이에게 모든 걸 털어놨다는 후련함과.. 일을 그만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상혁이 말이 맞아.
여기서 그만두게 되면.. 상혁이도 나도 풀리지 않은 앙금 같은 게 남을 꺼야.
그 사람은 준상이가 아닌 걸.. 그래.. 더 이상 흔들릴 일 따위는 없을 꺼야.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또 나는 나대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난 맡은 일만 다 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그동안 복잡한 마음 때문에 소홀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할 일이 많아.. 스키장으로 가기 전에 처리할 일들이 많은데..
그동안 너무 소홀했었어.. 언니 혼자 정신 없었을 텐데..
내일부턴 예전의 똑소리 났던 나로 돌아가는 거야..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아..

오랜만에 느끼는 아침의 상쾌함.. 찬 겨울바람도 한없이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회사에 가서 손에 잡히지 않아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정아 언니도 달라진 내 모습에 의아해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려는데 진숙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긴 백수 생활을 접고 드디어 취직을 했다며 한턱 낸 단다.
진숙이가 취직한 곳은 채린이 의상실이었다.
용국인 진숙이가 못내 걱정되는 듯 했지만.. 어쨌든 잘 된 일이다.

그 자리에서 용국이와 진숙이에게도 민형씨와 일을 한다는 것을 말했다.
진숙인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술에 취해 나에게 했던 말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잘 알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진숙인 잘 알고 있었고.. 그걸 걱정하는 거겠지..
당장 그 일 그만 두라는 소리에.. 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잘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다짐하지도 못했고.. 그 일을 그만 두겠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진숙이 말대로.. 일을 계속 하겠다는 결정이 과연 잘 한 것일까 하는 걱정스런 맘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상혁이가 허락했는데 뭐.. 하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더 이상 그 문제로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진숙인 용국이에게 업히다시피 해서 집으로 갔고 상혁이와 난 잠시 거리를 걸었다.
상혁이가 풀쩍 길가 돌 둑 위로 뛰어올라 위태롭게 중심을 잡으며 몇 걸음 걸어나갔다.
[생각나? 너 예전에 이런 데만 보면 꼭 이랬었잖아.. ]
[ ...그래.. 그랬었지.. ]
잊고 있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둑 위에 올라섰던 적이 언제였었지..?
까마득한 옛날 일 처럼 느껴졌다.
오래 되긴 했구나.. 아마 준상이가 죽은 뒤로 단 한번도 올라선 적이 없었을 테니까..
상혁이의 흔들리는 손에 겹쳐.. 내게 손을 내밀어주던 준상이가 떠올라 훅.. 숨을 멈추었다.  
[너 보면서 그런 생각했었어.. 이런데 올라오면 어떤 기분일까.. ]
[어때? ]
[음.. 인생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외롭고.. 흔들흔들 위태롭고.. 엇! ]
상혁이가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혁아! 괜찮아? ]
[응.. 예전에.. 너 이럴 때면 손잡아 주고 싶었다..? 손 좀 줘봐. ]
상혁인 내 손을 꼭 쥐었다.
[외롭고 힘들 때면.. 이렇게 내 손잡아..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
[그래... ]
[어쩌면.. 내가 먼저 너한테 손잡아 달라고 할지 몰라.. 그땐 내 손잡아 줄 꺼지? ]  
[ .... 그래.. 그럴 게.. ]

상혁이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긴 아주 오랫만인 것 같았다.
상혁이가 힘들어서 먼저 내게 손을 내민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내가 힘들 때.. 돌아보면 언제나 상혁이가 곁에 있었다.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도.. 상혁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상혁이가 나에게 먼저 힘들다는 얘길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 한켠이 싸하다..
상혁이도 얼마든지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었는데.. 나 때문이라도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럴 때면.. 그렇게 혼자서 삭혀왔겠구나.. 혼자서...
미안해 상혁아..
난..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야..
오로지 네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니가 어떤 마음인지.. 그런 것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나봐..
그런데 있지.. 솔직히 지금도 자신이 없다..
과연.. 내가 너의 손을 잡고.. 널 일으켜 줄 수 있을런지..
널 힘들게만 만들지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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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사람들 녹차향글방 펌




소리샘 (2002-11-07 20:38:37)  

사랑은 나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오로지 한사람에게 향한 마음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니
상혁이도 안됐고 유진이도 가슴 아프고
준상이는 이렇게 두 사람 가슴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서
힘들게 하는 군요


댓글 '4'

소리샘

2003.05.21 07:10:12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다녀와서 알려 드릴께요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달맞이꽃

2003.05.21 11:07:37

소리샘님 ..
유진이와 준상이가 어울려 놀던 설원에 풍경이 마음을 행복하게 합니다 ..다가올 또 다른 운명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두 마라 사슴이 되던 그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눈보다 하얗던 그들에 사랑이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이어질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후후후~~~소리샘님 ..좋은일이 있을것만 같다는 님에 말에 왜~~귀가 번쩍뜨이는지 몰겠네요 ..후후후~~아직도 현실과 과거를 오락가락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좋은일 있으면 같이 하는거 아시죠? ㅎㅎㅎㅎㅎ행복하세요^*

코스

2003.05.21 22:15:48

아픈사랑...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넘 안타까운 커플들였어요.
오늘 또 다시 겨울연가속의 두 연인들을 그리워해봅니다.
소리샘님...늘...행복하시구요...추억의 글 잘 읽고갑니다.^^

참...오늘의 좋은 일이 무엇인지 무지 궁금해지는 코스네요.*^^*

온유

2003.05.21 23:04:59

소리샘님 .....사랑은 나눌 수 없다......
정말 상혁이가 유진이에게 그런 사람이네요.그렇게 할수만 있다면 나누어 미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고 싶기도 했을텐데....그 사랑은 오직 한사람에게만 향하게 정해져 있으니.............

소리샘님 저두 궁금한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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