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9] 녹차향글 펌

조회 수 3090 2003.06.13 16:46:11
소리샘
유진의 겨울연가.. (19)


방에서부터 언니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어제 춘천에 이 이사랑 같이 갔다며? 도대체가.. 맘이 안 놓여. 맘이.
이 이사랑 너랑 같이 있다고 하면 내 가슴이 다 철렁해.
이런 말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말야.. 둘이.. 아무사이도 아닌거지? ]
언니의 물음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
버럭 화를 내자 언닌 움찔 어깨를 움추렸다.
[야. 아님 말구.. 참내.. 지금 누가 화를 내야하는데..
춘천집에선 나간지 한참 됐다고 그러는데 도대체 연락은 안되구.. 오지도 않구..
그러니 김차장님이랑 나랑 별별 생각이 다 안들겠어? ]
[연락 없이 늦은 건 미안한데.. 제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줘. ]
[아휴.. 무섭다 무서워. 치.. ]
뒤에서 계속 궁시렁대는 언니를 모른척 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그와 김차장님을 만났다.
김차장님과 언니가 서로 불만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고
그도 김차장님에게 호되게 추궁을 당했는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 우연이었던 척 곧바로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쿵쿵..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그러나 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면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달리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먼저 피하는 건 나였다.

이제 그는 이민형이라는 사람으로.. 준상이와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진작에 그랬어야할 아주 당연한 것이리라..
처음부터 그는 준상이가 아니었고.. 그가 덮어쓰고 있었던 준상이의 그림자는 내가 씌운 것이었으니까..

이것으로 모든 게 끝이 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그저 과거의 그것이 10년을 뛰어 넘어와 잠시 내 맘을 흔들어놓는 것이고..
그래서 그를 이민형이라는 다른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곧 사라질.. 그런 것이라면..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아마 난 계약된 공사가 끝나면 다신 그를 볼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를 만나기 전의 내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 많다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한 명 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내 마음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길이 아닌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유난히 포근한 오후..
곤돌라 승강장에서 그를 기다렸다.
춘천을 다녀온 후엔 그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없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를 대하는 내 모습이 많이 어색해 보이면 어쩌나..
레스토랑에 가선 일에 관한 얘기만 하고 서둘러 내려오리라..
저만치서 그가 빠른걸음으로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
[아니요.. ]
그리곤 말없이 곤돌라에 올랐다.

레스토랑에 가자마자 수첩을 꺼내들고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일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여긴 굳이 구조변경까지 할 필욘 없겠어요.
벽돌느낌은 그대로 두고.. 전체적인 느낌은 화이트로 가는 게 좋을거 같애요. ]
[맞다.. 유진씨가 좋아하는 색깔... 흰색이라고 그랬죠? ]
느닷없이 무슨 얘긴가 싶어 수첩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 맞죠? 좋아하는 음식은 뭐에요? ]
툭... 툭...
가슴 한구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왜 물어봐요? ]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기억해 두려구요. ]
가슴을 조여오던 끈이 갑자기 툭하고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 사람은 준상이가 아니면서.. 준상이의 말과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애써 준상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 놓으면 어째서 다시 헝클어버린단 말인가..

가쁜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음과 머리를 추스르고 그를 따라 나섰다.

해가 지면서부터 밖의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어느새 하늘엔 검은 구름이 뒤덮여있었고 점점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도 날씨가 걱정이 되었는지 일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승강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곤돌라 운행이 멈춰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밑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그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 어떡하죠? 바람이 너무 세서 바람이 잦아들 때까진 운행을 할 수가 없다는데.. ]
[그럼.. 어떡하죠? ]
[어떡하긴요.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일단 레스토랑으로 가요. ]

그는 말없이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장작을 집어넣었다.
난 창문에 붙어서서 연신 밖의 날씨를 살폈다.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에 그와 단둘이 있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참기 힘들었다.
[걱정돼요? ]
[조금요.. 혹시 걸어서 내려갈 순 없나요? ]
그는 그런 내가 바보같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길 어떻게 걸어서 내려가요?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봅시다. ]
[네... ]

난 추워서 옷을 꼭꼭 여미면서도 선뜻 난로 앞.. 그의 곁으로 가 앉지 못했다.
괜히 날씨를 살피는 척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랑 있는 게 불편해요? ]    
그렇게.. 표가 났나?
나 때문에 그의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불편한 게 아니라면 이리와서 불이나 쬐요. ]
[아.. 아뇨. 이층 좀 더 살펴보고 와야겠어요. ]
난 도망치듯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오자 힘이 쭉 빠져버렸다.
벽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행동하리라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그게 왜 이렇게 안 되는지..

아니.. 어쩌면 그와 마주하고 있는 시간동안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나에겐.. 더더욱 하기 힘든 일이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 되고 만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내 머릿속엔 준상이가 들어와 있고..
그의 목소리.. 표정 하나하나에 난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다 그가 이민형으로 돌아오면.. 요즘의 알 수 없는 내 감정 때문에 또다시 괴로워지는 것이다.
한 사람을 두고.. 두 개의 다른 감정이 뒤엉켜있는 지금의 나를.. 어쩌면 좋을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추위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난로 앞에 앉아있는 그의 머리는 약간 숙여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잠이 든 건가..?
가만히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의 얼굴에 걸려있는 안경이 불편해 보여 살며시 안경을 벗겨 손에 들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예전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안경을 벗겨내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몸이 숙여졌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오랫동안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마 끝에서 턱 끝까지..
내 숨결에 그가 깰까.. 잔뜩 숨을 죽이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안경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할 수도 있구나..
마치 준상이가 내 앞에서 잠이 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상이가 살아있다면.. 꼭 이 모습 그대로겠지..?

한참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가 눈을 떴다.
난 놀라서 얼른 몸을 바로 세웠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 마냥 가슴이 쿵쾅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제서야 내가 그의 안경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안경.. 벗겨 주려구요.. 불편해 보여서... 여기요. ]
난 그의 눈길을 피한 채 안경을 건네주었다.
그리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까지.. 죽은 사람 생각하며 살꺼에요? ]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려다 그의 말에 멈칫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 잊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
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입을 통해 또 어떤 얘기가 나올지.. 두려웠다.
[유진씨한테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친구가 살아있었다면.. 지금도 유진씨랑 사랑했을까요? ]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준상이가 살아있었다면..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겠느냐고..?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민형씨!]
[그 친구가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 아닌가요? ]
난 심한 모욕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집착이라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 준상인 절대 변하지 않아.
살아있다면 준상인 지금도 날 사랑했을꺼야. 내가 그런 것처럼.
[그만하죠. 이민형씨가 상관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더욱 강해졌다.
[아뇨! 상관하고 싶어요.
나한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다고 그랬죠? 그래요. 나.. 사랑이 뭔지 잘 몰라요.
하지만.. 내가 볼 땐 유진씨가 그 죽은 사람 생각하는 것도 사랑 아니에요. ]
울컥 눈물이 솟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내가 이 사람에게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하는가.
[그만하죠!]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미련이고 자기 연민이에요. 왜 그걸 몰라요! ]
[그만해요! ]
내 입에선 비명처럼 그만 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 미칠 것 같아..
[제발 정신 차리고 현실을 봐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구요! ]
숨이 막혔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만해요! 이제 제발 그만 하라구요!! 나한테 왜 이래요? 나한테 왜 이러냐구요! ]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좋아.. 한다고..? 누굴..? 나를...?
그도 자기가 한 말에 놀랐는지 곧 터질 것처럼 격했던 그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곧 뭔가를 결심한 듯 확고해졌다.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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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 글방 펌











댓글 '3'

권은혜

2003.06.13 16:58:36

겨울연가.. 참잘봤는데..이쁜지우님모습보면서..
제가젤좋아하던대사에요..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대사할때.. 얼마나 좋았던지... 용준님이 얼른 고백하길 바라고 있었거든요...
겨울연가 녹화한거 또봐야겠다 ~ ^.^




★벼리★

2003.06.13 17:56:19

ㅇ ㅏ아 글을 볼때마다 장면장면이 하나씩 생각나네요..
저에게 유쾌해야할것이 하나도 없었던적에 연가때문에 살았고 1년 버텼거든요..
연가때문에 살았다는건 쫌 글치만..ㅋㅋㅋ
암튼 소리샘님이 이렇게 퍼다 주시는 글 읽으면서 다시 감회에 젖게 되네요..항상 고맙습니다...^^

혜경

2003.06.14 00:58:04

유진의 숨결이 마음이 더 가깝에 느껴지는 글이에요 정말 생생하게 장면장면이 떠오르네요
좋은글 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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