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20] 녹차향님 글펌

조회 수 3024 2003.06.16 10:20:21
소리샘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왔다.
심한 눈보라에 막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그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외쳐대는 것만 같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잘 못 들었던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추위와 피로에 지쳐 찾은 곳은 아까 그를 피해 올라와 있었던 그 방이었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벽에 머릴 기대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건 사랑이 아니고 미련이고 집착이고 자기연민이에요!
그 친구가 살아있었다면 아직도 유진씨랑 사랑했을까요?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가 했던 말들이 두서 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들은 말들이 다 꿈이기를.. 아니 그 사람이 나타난 것부터 모두 다 거짓이기를...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영영 사라져버렸으면..

집착.. 미련.. 자기연민..

지난 10년 간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 사람 말대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 걸까..
죽었기 때문에.. 날 사랑했던 준상이로만 기억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난 한번도 준상이가 날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여전히 준상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10년이 넘도록 이렇게...
하지만.. 어쩌면...
그의 말이 모두 틀리다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을 테니..
어쩌면.. 정말 어쩌면 준상이도 나와 같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난 무엇을 붙잡고 있었단 말인가.

갑자기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시려왔다.
힘없이 옷깃을 여미었다.
날 여태껏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외투가 한순간 벗겨져 버린 듯.. 허전하고 추웠다.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난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온기가 죽을 만큼 그리웠다.
몸도 머리도 가슴도 꽁꽁 얼어 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를 어떻게 봐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그런 건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 힘겨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없었다.
그와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머리는 맑아져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하늘과 햇빛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어제의 그 눈보라는...?
마치 긴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날 덮고 있던 그의 겉옷을 보고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가만히 그의 옷을 걷어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짠했다.
내가 잠든 후에 돌아왔구나.. 내내 날 찾아 헤맸겠구나..
그럼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밖으로 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과 머릿속에 박혀있던 텁텁한 먼지들을 몰아내주는 것 같았다.
언덕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어제 밤의 일들을 정리해 나갔다.

차가워지자. 그리고 냉정해지자.
여기까지야. 더 이상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 감정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준상이와 너무 닮아서.. 그래서.. 준상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던 것 뿐이야.  
그래.. 그게 다였어. 그게 다야..

그리고 준상이에 대한 내 사랑..
어쩌면 그의 말대로 미련이었고.. 자기연민이었고.. 집착이었는지도..
하지만 설령 나의 사랑이 정말 그것 이었다해도.. 지금의 나에겐 중요하지 않아.
내 기억 속의 준상인 날 사랑했고.. 그리고 나도 준상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
그것만.. 그것만 기억하면 돼..
그리고 그 사랑도.. 이젠 정말로 기억으로만 남겨야 할 테니까..

[어제 밤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
언제 왔는지 어느새 그가 바로 곁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밤에 산 속에서 길 잃으면 찾기 힘들어요. 앞으론 그러지 마요. ]
그의 얼굴은 많이 지쳐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인사치레를 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만 내려가죠. ]  
[어제 일..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내가 유진씨 마음 아프게 한 건 알지만.. 그래도 난 내 감정을 말한 거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미안함.. 안쓰러움.. 그리고 고마움...

그는 날 사랑한다고 또 다시 확인 시키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던 날.. 그런데도 이런 날 사랑한단다.
그냥 어제 한 말은 잊어버리라고..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마음이 편했을까.. 아님.. 서운.. 했을까..
아니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난 아무것도 변할게 없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는 더더욱 안되는 것임을 난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가 아무리 원해도.. 내 길에서 나를 조금도 벗어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를.. 이제 어쩌면 좋을까..
내 탓이리라..
그가 날 이상한 여자로 알았던 그때.. 그대로 끝냈어야 했다.
나에 대해 그리고 준상이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때.. 그와의 인연을 끝냈어야 했다.
준상이 대신이라도.. 그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내 욕심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내 욕심이 그를 내 헝클어진 실타래 속으로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것뿐이니.. 내가 밀어내면 그는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더 이상 나와 얽히는 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나.. 늘 궁금했어요. 준상이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내 기억 속의 준상인 언제나 18살의 모습뿐이니까..
이민형씨를 통해서 준상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나.. 많이 기뻤어요.
하지만.. 이민형씨한텐 아무 감정 없어요.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
말을 마치자마자 난 도망치듯 그의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곧 그에게 팔을 잡혀 그와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정말 날.. 한순간도 좋아한 적은 없었나요? ]
그의 간절한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혀왔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강준상이 아닌 이민형으로 날 좋아한 적은 정말 한번도 없었나요? ]
쿵쿵쿵.. 심장이 제멋대로 뛰며 귓가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래요! 있었어요. 그렇게 느꼈던 적..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어요. 단지.. 내 가슴이 혼동했던 것뿐이에요.
내 가슴이!... 내 가슴이 당신을.. 준상이로 느꼈을 뿐이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얼굴로 더이상 날 바라보지 말아요.

[네. 없었어요. 이민형씨.. 좋아한 적 없었어요. ]
[진심이에요? ]
[... 네.. ]
내 대답에 그는 잠시 말을 잃은 듯 날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럼.. 나한테 기회를 줄 순 없나요? 나.. 준상이란 사람..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이 뭘 좋아했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유진씨한테 어떤 말을 했는지..
내가 다 잊게 해줄께요. 나.. 이런 말하는 거 유진씨가 처음이에요. ]

나.. 이런 말하는 거 니가 처음이야..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같은 말을.. 그의 입으로 또다시 듣게 되다니...
이 사람은 준상이가 아닌데.. 어째서.. 준상이처럼...

[아니요.. 다른 어떤 사람도 준상일 대신 할 순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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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님 글방펌












댓글 '2'

달맞이꽃

2003.06.16 12:08:01

다른 어떤 사람도 준상이를 대신 할수 없지요 ..
유진이와 준상이는 우리 기억속에서 항상 같이 해야만 하니까 ...상혁이도 채린이도 그들에 사랑을 떼어 낼수 없어요 ..후후후후~~~
소리샘님 오늘도 감미로운 음악과 어우려져 설원속에 그들을 만나고 갑니다 .고마워요~~^*

코스

2003.06.16 21:21:35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유진이는 이 말를 듣고 그녀의 감춰진 마음이 있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고있던 민형의 사랑
그래서 더 크게 당황스러웠을 유진...
왜 그녀 앞엔 이렇듯 힘든 사랑만이 다가오는건지..
녹차향님...가슴을 조려가면서 아프게 바라보던 장면들에
또 다시 같은 아픔으로 글을 읽어내려가곤 합니다.
또 다른 글로써 만나는 유지과 민형의 사랑 언제나 제 마음을 설레이게 만드네요.
감동스런 글 감사드리구요.
매일 정성스럽게 올려주시는 소리샘님..
저 요즘 겨울연가 홈을 자주 들어가면서 님이 올려주시는 '임형주'님의 노래 감상하곤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남은 시간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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