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8]

조회 수 3052 2003.06.12 10:08:03
소리샘
스키장에 도착할 때까지.. 난 창가로 고개를 돌린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잠들었다 생각했는지 차를 멈추고 한동안 그대로 앉아있었다.
난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요? 저.. 아까 내가 한 말... ]
[아니요.. 고마워요.. ]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처음엔.. 사실 화가 났었어요. 내가 어떻든.. 그건 민형씨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는 동안 생각해 보니.. 민형씨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요..
난 지금까지.. 준상일 잊으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준상일 잊을까봐 두려워했는지도 몰라요.
준상이와의 추억들.. 그냥.. 잊혀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훗.. 내 스스로 날 그 추억 속에 가둔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
눈물이 핑.. 돌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도 어느덧 물기가 어렸다.
[그걸..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요.. ]
[유진씨.. 마음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요. ]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민형씨가 한 말들.. 다 사실인 걸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난.. 괜찮으니까.. ]
난 훅.. 숨을 들이쉬었다.
[그만 가요. 다들 걱정할 텐데.. 너무 늦었네요.. ]

그와 문 앞에서 헤어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문에 기대고 서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닌 화장대 위에 메모를 남기고 잠들어 있었다.
[너.. 전화도 안 받고 지금까지 어디서 뭐하는 거야?
어머닌 괜찮으신 거니?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서 봐준다. 내일 두고 보자. ]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전화길 들고 앉았다.
[여보세요? ]
[희진아.. ]
[언니? 왜 이렇게 늦게 전화해. 걱정했잖아. ]
[미안해.. 어디 좀 들렀다 오느라고.. ]
[어디? 호숫가? ]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그가 희진이에게서 호숫가 위치를 알게됐던 거구나..
[응... 엄만 어떠셔? ]
[괜찮아.. 지금은 주무시고 계셔. ]
[그래... ]
[언니.. 아까 그 아저씨 말야.. ]
[너.. 준상이 얼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니..? ]
[그러게..? 나도 이상해. 근데.. 그 아저씨 본 순간.. 딱 알아 보겠더라구..
어떻게 내가 아직도 준상 오빨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참.. 이상해.. ]
[그랬구나.. ]
[근데 언니..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디 아퍼? ]
[아니?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만 자. 엄마한테 나 잘 왔다고 얘기하고. ]
[알았어. 언니 잘 자. ]
  
전화를 끊고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이불로 몸을 꼭꼭 감싸안고 잔뜩 웅크린 채 얼굴만 내밀고 누웠다.

후........
참.. 이상하지..
그 사람한테 화가 나지 않아.. 불쾌하지도 않고..
나에 대해 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고.. 준상이에 대해 안 건 더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나에게 주제넘은 간섭을 했어.
그런데도..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는 건 왜일까.. 왜일까..

아까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팔을 잡고 소리치던 그의 얼굴..
진심으로 아프고 안타까워 보였던 그의 눈빛..

툭.. 툭..  

가슴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를 떠올리는데.. 가슴이 뛰다니..

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기대고 어둠에 잠겨있는 방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눈이 아플 때까지 열심히 구석구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다시 그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툭.. 툭..
여전이 가슴에서 떨어져 내리는 울림을 느끼며.. 난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준상이를 알게된 후..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그 느낌..
그때 난 행복..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가.. 갑자기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베개를 안고 뒹굴기도 했다.
얼른 아침이 되길 기다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었다.
준상이에 대한 기대감과 그리움.. 그 모든 것은 날 마냥 행복하게 했다.
준상이와의 오해로 잠시 멀어졌던 그때에도.. 실망보단 그리움이 더 컸었다.

그런데..
준상일 보내고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그 느낌이.. 10년 만에 날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행복이 아닌.. 두려움과 혼란을 가지고..

난 애써 그 느낌을 부정했다.
10년 전 느꼈던 그 느낌과 같은 것일리가 없다고..
호숫가를 다녀온 여파로.. 그저 잠시 내 머리와 가슴이 혼란스러운 것뿐이라고..
이 느낌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단정지었다.

가방과 서랍을 뒤졌다.
아무 약이라도 먹어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감기약 몇 알을 찾아내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어렸을 적에나 해봤던 숫자세기를 했다.
잠들기엔 별 소용이 없지만 잡념을 떨치기엔 참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핸드폰 알람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7시..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두 세시간 쯤 잔 것 같았다.
언니가 깰까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아주 오래도록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밑에 서있었다.

**********************************************
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님 글방 펌










댓글 '5'

혜경

2003.06.12 11:16:48

다시금 겨울연가의 감동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 기다려지네요

김문형

2003.06.12 18:15:15

소리샘님.
오늘도 잘 보내셨나요?
매일 올려주시는 글을 보며 다시한번 연가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있네요. 인천은 이제야 비가 그쳤는데 대전은 어때요? 전 비가오는 날은 싫거든요. 여기저기 욱씬,욱씬.. 아시죠? 감사하구요. 녹차향님께도 이렇게 좋은글 써주셔 감사해요... 늘 행복하세요.....

온유

2003.06.12 22:23:55

소리샘님이 올려 주시는 글들로 추억 밝기를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가 끝이 나면 소리샘님의 흔적을
혹시 못 볼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아~~~어떡해요,저 소리샘님하구 정이 벌써 흠뻑
들었나봐요...
오늘 이 리플 꼭 기억해 주세요~~~

★벼리★

2003.06.13 00:11:08

툭.. 이 한단어가 되게 의미있게 다가와요..
툭..그냥..되게 무뚝뚝하고 그런 말이었는데..
연가 이후로는 굉장히 쓸쓸하고 툭하는 말을 들을때마다 유진이인냥 같이 툭하고 떨어지는 마음의 저를 발견하게 된답니다..
매번 글들 감사합니다...^^

달맞이꽃

2003.06.13 10:31:44

소리샘님 ..비온뒤 아침 햇살이 넘 눈부시네요 ..몇일전엔 매미가 울더라구요 ..이젠 정말 여름이 돌아왔어요 ..우리홈을 잊지 않으시고 매일 겨울연가 기억 찾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녹차향께도 감사드리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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