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조회 수 3052 2002.09.02 09:58:20
만남
9월의 첫 월요일입니다.
처음이라는건 의미있는 말이죠.
게시판을 통해 처음 만나고 채팅방에서 처음 만나고 전화로 처음 만나고 ...그리고 또 만나다 보면 궁금증이 더해가죠. 이 분은 내가 생각한 사람과 같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지우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알고 사랑할까?  그런 궁금증으로 설레임을 가지고 오프상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더욱 친해지고 그 친밀도가 게시판에 드러나기도 하며 때로 본의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하죠.
어제 퀴즈 문제 중에 "밀가루는 체에 칠수록 고와지나 (  )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는 문제가 있더군요.
게시판에 글은 제대로 쓰지않지만 지나친 호기심으로 이 집 저 집 다니다보니  어느 날 불현듯 오해를 받기도하고 때론 스스로 오해를 자초하기도 했다는 생각도 들고....
때론 아니 대부분의 경우 말을 아끼는게 더욱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도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나요? 피천득님의 '인연'
여기저기 드나들다 만난 최만세라는 분의 홈피에 가니 그 수필이 전재되어있어 퍼왔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이 ....아니 만났으면 좋았다는 그런 만남은 아니었기를^^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가고 말았다.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있는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교육가 미우라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 시로가네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잇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된 책상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 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데르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년이 지나고 삼사년이 더 지났다. 그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여학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여학원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 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 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돼서 무엇보다도 잘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이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셨다.

뾰죽 지붕에 뽀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 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댓글 '3'

운2 현주

2002.09.02 11:53:11

얼마전에 피천득님과 아사코의 4번째 만남이란 프로를 한다는 예고만 보고 본방을 못봐서 아쉬워하고 있었어요 안그래두..... 저도 학교다닐때 이 소설배웠던 기억나네요..맨 마지막을 글을 참 좋아했는데.. 살다보니..저말이 딱 어울리는 만남도 있더라구요..

바다보물

2002.09.02 12:45:32

나는 그프로 봤답니다 왜 내마음이 설레건지... 수필 정말 고맙습니다

캔디

2002.09.04 01:07:56

나도 봤당. 너무 재미있었죠? 피천득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의 글도 나이와 함께 새롭게 느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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