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읽어 보세요. 파리얘기에요...

조회 수 3224 2001.09.19 04:38:23
그린
저는 올빼미랍니다. 그래서 밤에만 나타나지요.
현주님의 글(842)에 힙입어 몇자? 적어 봅니다.

  오늘 아니, 어제죠? 제가 한 생물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흑흑흑!
나의 일터에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때가 되었으니 뭔가를 먹어야 될 것 같아서 비빔밥을 시켰습니다.
열심히 팔 아프게 비벼서 한 입 먹고 있는데 어디서 핑핑 놀고 있던 파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감히 나의 밥을 넘보고 있지 뭐예요?
  물론 파리도 먹고 살아야 하고, 그저 먹을 것 있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하는 불쌍한 파리 인생 이해는 합니다만, 저 파리가 앉았던 밥 먹기 싫었습니다. 파리에게 한 입도 줄 수 없었죠. 왕파리도 아닌 정말 쬐그만 파리가 드디어 나를 약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지 감히 나의 밥에는 앉지 못하고 내 주위를 빙빙 맴돕니다.
  머리에 앉았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압니다. 저 예민합니다. 툭! 쳤습니다. 제 머리기 때문에 세게 못 때립니다. 당연히 도망갔겠죠? 5초도 안되어 나의 왼팔에 앉아 간지럼을 태우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탁! 때려서 잡을 수도 있었지만 파리 사후의 지저분해질 상황도 상황이지만 제 팔이기 때문에 그냥 팔을 흔들어 쫓았지요. 그랬더니 이번엔 바로 날아서 나의 오른팔에 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를 여러번 '둥글게 살자'가 저의 생활 신조이고 파리의 인생도 이해하려고 해보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거죠.
  파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뒤져서 파리채를 찾아냈습니다. 아시죠? 빨간 파리채.
그 파리채를 잡기 쉽도록 오른팔 옆에 떡 갔다놓고 다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파리가 어디에 앉았는 줄 아세요? 바로 보란듯이 파리채 손잡이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내참 우습지도 않아서... 살짝 건드려 다시 쫓았지요. 내 몸을 움직이면 파리가 가까이 안오기 때문에 눈동자만 굴려서 파리를 쫒았습니다. 여기저기 좀 방황하더니 내가 앉아있던 옆 의자 등받이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기회는 왔습니다! 파리가 눈치 챌새라 살그머니 그 빨간 파리채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파리를 향해 날렵하게 힘껏 내리쳤지요. 명중한 것 같았는데... 당연히 의자위에 떨어져야할 파리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도망갔나?  여기 저기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리의 시체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일어나서 의자를 들어냈습니다. 그 밑에 떨어져 누워있더군요. 까만 점처럼. 확인 사살이 필요없었지요. 그제서야 들고 있던 파리채를 놓았습니다.
  파리의 시체를 확인하고 나니 밥맛이 떨어졌습니다. 저 밥 남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몇 숟가락 정도 남았더군요. (그래도 중간 중간 많이 먹었네요. 무슨 맛이었는지 모르겟지만. 아마 비빔밥 맛이었겠지요.)  저 생각했습니다. 죽은 파리에 대해서.... 이렇게 남길걸 좀 나누어 줄걸. 밥알 하나였으면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을. 저 보았습니다... 파리와 밥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감정 싸움을 한 저를...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빨간 파리채로, 때론 파란 파리채로, 때론 신문으로, 때론 잡지로 아무런 생각없이 때려잡았을(무섭죠?) 파리들이 많겠지만 오늘 이 파리처럼 내 생각속으로 들어 온 파리는 없었는데... 가끔씩 어느 순간, 정말 별것도 아닌것에 눈길을 주고 생각을 주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파리 한 마리 죽이고 이렇게 많은 생각에 잠겨있는데 미국테러 사건에 관한 기사가 제 눈에 들어옵니다. 바다 건너 이웃나라에서는 자유수호를 이유로, 종교를 이유로, 인종차별을 이유로 전쟁을 시작하려고 한다는군요. 테러로 죽어간 많은 무고한 사람들, 전쟁으로 죽어갈 무고한 많은 사람들. 파리목숨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무기가 필요없고 전쟁이 필요없고 파리채가 필요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감히 바라봅니다. 이 신새벽에...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기실...





댓글 '8'

프링겔

2001.09.19 05:48:51

똑똑님이시져... 음.. 항상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을 쓰시는군여... 님두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현주

2001.09.19 13:55:48

난 이거 어느 작가가 쓴 에세이인줄 알았어여...마지막줄을 보니..직접쓰신거군요...와~~ 글을 너무 잘쓰시네여....

차차

2001.09.19 16:48:06

우와~ 정말루 글 잘쓰시네여~^0^~~

현경이~

2001.09.19 20:24:57

ㅋㅋㅋ 잼난 에세이였어여~ 작가등단하셔두 될꺼 같은데여~~

삐삐

2001.09.20 00:43:12

정말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여~~~좋은글 감사해여~~~

그린

2001.09.20 01:45:01

프링겔님, 전 줄 어떻게 아셨어요? 무서워요. 모두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너무 과찬이세요. 부끄럽습니다. 자꾸 똑똑님으로 표기하셔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그린

2001.09.20 01:45:42

ID를 바꿨어요. 죄송~

현주

2001.09.20 14:13:46

똑똑님=그린님...접수완료~ 근디..프링겔..어찌알았냐?..멜주소 보구 알았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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