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한다는 것...

조회 수 3200 2002.04.10 06:57:14
토미
  필리프 사시에의 <왜 똘레랑스인가>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똘레랑스한다는 것,
     그것은 견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부담을 견디는 것처럼 말입니다.

     똘레랑스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똘레랑스는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나온 프랑스인의 깊은 사상적 기저基底를 뜻합니다. 영어로는 tolerance로 관용, 아량, 인내를 뜻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품성중의 하나가 아마도 똘레랑스가 아닌가 해서요. 똘레랑스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해서 합일점을 찾는 타협이 아닙니다.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서로 다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똘레랑스입니다.

  지난주 토요일에 서점에서 구입한 책中에 <책그림책>이라는 이상한 제목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읽기보다는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사촌조카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한 책인데, 부제副題가 재미있어 적어봅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책 그림책"

  책에 매료되어 본 적이 혹 있으십니까. 한 눈에 자신을 사로잡는 책을 보고 짝사랑하는 이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며 호흡이 가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도서관에 꽉 들어찬 책들 사이를 거닐며 책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황홀해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책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그림책>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밀란 쿤테라, 미셸 투르니에, 존 버거 등의 글과 <소피의 세계> 표지그림으로 유명한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이 책은 어쩌면 그런 이들을 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 그림책>에는 책과 사람에게서 유추해 낼 수 있는 온갖 상상력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하게 하는, 한껏 부러움을 살만한 그림뿐입니다.

  가위에 찔려 피를 흘리는 책, 사람을 가둬두는 책, 독한 사랑의 열병이라도 앓은 듯 쓸쓸해 보이는 책, 부드러운 대지와 달빛 아래 책을 덮고 잠이 든 사람, 문을 열 듯 책 커버를 여는 사람, 투명인간처럼 책을 통과해 나가는 사람, ...

  그림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라도 더 찾아보고자 하는 욕심 탓일 수도 있고 시선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 그림 속 이야기들 탓일 수도 있습니다.

  혹, 그림마다 덧붙여진 이야기들은 원치 않는다면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빈 노트를 하나 꺼내 옆에 놓아둔 채 그림 하나를 보고 거기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지어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단순한 느낌이라도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노트를 채워가다 보면 자신만의 책 그림책이 만들어질 것이고,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책 그림책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본문을 일부 적어 보자면... 그림도 같이 보면서 읽어야 하는데 이 시간에 스캔할 곳도 없어서 부득이 그림을 빼고 적게 되었습니다.

  미하엘 크뤼거, 48쪽

  나는 물의 시인이다. 나는 젊은 시절 북해 바다의 도도한 슬픔을 노래했으며, 여름날 조용히 흐르는 실개천의 마력을 노래했다. 나는 내 고향의 꿈처럼 고요한 호수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남쪽 하늘 아래서 파도의 리듬에 귀를 기울였다. 축복을 내리는 하늘 아래서 조약돌들의 나직하게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내 집을 팔았고, 나의 유년 시절을 뒤로 하고 떠났으며, 나의 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수집했던 돌들과 조개 껍질들을 바다가 다시 가져가도록 해변에다 뿌렸다. 그릇은 깨어졌다. 종이의 목마름도 고갈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마지막 시를 쓴다. 내 앞은 흐릿하고 부드러우며, 내 주위에는 한때 나였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내 등 쪽에서는 또 다른 바다가 자연으로부터 걸어나오며, 솟아오른다.

  : 이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은... 윗몸을 타자기 위로 구부리고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책상 위에 기자와 구경꾼들이 올라서서 타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안토니오 타부키, 82쪽

  스몰러Smaller씨는 43쪽과 44쪽 사이에서 정말이지 너무 꼭 조여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이 숭고한 느낌을 가슴에 품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는 작가와 함께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으며, 심지어는 작가를 향하여 자기가 작품에 참여하는 주인공 역할을 맡겠노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단어를 프랑스어로 말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앙가쥬>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게 보였던 것이다. 작가는 그를 불신의 눈길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떤 관점에서의 앙가쥬란 말이오?" 그러자 스몰러Smaller씨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정치적 참여 말이지요,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작가가 입을 비죽이며 선언했다. "그건 이제 더 이상 유행이 아니지요. 당신은 43쪽에 서 있도록 하시오. 그리고 주인공에게,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진정한 신新-신新-신新 낭만주의자에게 담배가 한 대 권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스몰러Smaller씨는 43쪽에 갇혀 있게 되었다. 식자공은 곧바로 그의 이름을 S-m-a-l-l-e-r라고 만들어 넣었다. 그러고는 맥주를 마시러 갔다. 스몰러Smaller씨는 그 틈을 이용하였다. 그는 S활자를 빼버렸다. 그것을 코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M자를 빼버렸다. 그것을 이마라고 여기면서. A자도 빼버렸다. 그것을 입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개의 L자도 빼버렸다. 그것을 두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E자와 R자도 두 다리라고 생각하면서 빼버렸다.

  그리고 두 작은 다리로 그곳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작가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다른 소설을 찾으러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형이상학에도 행운이 있기를."

  : 이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은... 투명인간처럼 책을 통과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 그림입니다.

  수잔 손탁, 90쪽

  나는 집에 있으면서 책을 썼다. 예정된 쪽수의 중간을 간신히 넘긴 후였다. 내가 쓰고 있는 것에 대해 흡족해지는, 정말로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또한 책을 쓰기가 더 쉬워지지는 않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싫증이 났다. 잠이 왔다. 내 소설의 여주인공이 방금 조끼를 입었다. 그녀는 나의 기력을 소진시켰다. 나는 눕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방에 있는 침대나 소파에 눕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책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여하간 잠깐만 눈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날아다니는 것. 지금 내 마음속의 간절한 느낌은 내가 드러눕기를 바라고 있다.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바닥에 누워 있으려면 나에게는 책이 필요하다. 나는 맑은 달과 은빛 공기 아래 무성한 잔디밭에 누워 있다. 그리고 (중간 부분을 간신히 지난) 책이 내 몸을 덮고 있다.

  그러므로 전화나 팩스의 사정거리 바깥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른 책들, 다른 작가들에 의해 씌어진 많은 책들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경탄해 마지않는 책들, 너를 텔레비전이라는 괴물로부터 지켜주는 책들로부터...

  독자 여러분이 보듯이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있다. 심지어는 나를 덮고 있는 책으로부터도. 위에는 책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다. 내가 나의 책에 대해 무슨 꿈을 꾼다할지라도 다시 깨어난 후에 그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리라. 나는 대지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 이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은... 부드러운 대지와 달빛 아래 책을 덮고 잠이 든 사람이 있는 그림입니다.

  김용택의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중에 나오는 구절이 재미있습니다.

     손이 터서 쓰리면 나는 어머니에게 갔다.
     그러면 어머니는 꼭 젖을 짜서 발라 주었다.
     젖꼭지 가까이에 손바닥을 대면
     어머니는 쪼르륵 쪼르륵 짜주었다.
     젖이 많을 때는 주사기에서 나올 때처럼 찍찍 나왔다.
     젖이 적을 때는 한 방울씩 똑똑 떨어져 손바닥에 고였다.
     그 새하얀 젖을 손등에다 발랐다.
     그러면 당장은 쓰렸지만 손은 금방 보드라와졌다.
     어머니의 젖은 또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나
     눈이 아플 때도 쓰였다.
     나를 반드시 뉘어놓고
     어머니는 젖꼭지를 눈 가까이 들이대고
     젖을 한 방울 뚝 떨어뜨렸다.
     그러면 나는 얼른 눈을 꿈벅꿈벅해서
     젖이 눈에 고루 퍼지게 했다.
     그러면 눈도 역시 보드라와지곤 했다.
     한겨울 지나 이른 봄 손등이 쩍쩍 갈라지면
     어머니는 늘 젖을 짜 크림 대신 발라주곤 했다.

  이른봄이면 손등이 쩍쩍 갈라지는 경험을 하고 자라게 마련이었던 '촌놈'들에게는 실감이 나는 표현일 겁니다. 따뜻함과 그리움의 모든 것이 어머니의 젖 속에 담겨 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고, 사랑의 근원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자의 유방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부드러움과 따뜻함과 포근함의 본향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젖은 그 이상입니다. 우주의 중심이고 사랑의 근본인 것, 그것이 어머니의 젖입니다.

  신경이 쓰이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낮에 중요한 만남이 있거든요.
  나갈 때 뭘 입고가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이 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댓글 '2'

순수지우

2002.04.10 09:26:43

똘레랑스...참 재밌는 발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인내라는 깊은 뜻을 가진 불어군여..인내가 필요할때 똘레랑스를 꼭 기억해야겠어여^^ 토미님 감사합니다.좋은하루되세여~*^^*

세실

2002.04.10 09:33:51

홍세화님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첨 톨레랑스란 단어를 접했죠. 선거의 계절을 맞은 우리들에게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말인것 같습니다. 토미님 너무 긴장하지마시고 평소대로 성의껏 만남을 가지신다면 좋은 결과 있을거예요. 이미 출근하셨죠? 옷도 이왕이면 튀지않으면서 님이 가장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정장이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 좋은 만남 보람된 시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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