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성공인가...

조회 수 3244 2002.04.15 07:01:30
토미
  지난 글에 이어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오는 구절을 적어봅니다.
  이 책 '제6장 인생을 바꾼 7가지 지적 경험'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생을 바꾼 7가지 지적 경험

  개인, 특히 지식을 응용하여 일을 하는 지식 근로자 개개인은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개인은 어떻게 수 세대에 걸친 변화의 시대에 낙오하지 않고 자신의 일과 인생 모두에서 효과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는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질문이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도 좋을 성 싶다. 나는 나 자신을 효과적인 사람,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간단히 말해 과거의 노예가 되는 일 없이 나이를 먹는 법을 가르쳐준 내 인생의 일곱 가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 대학생 신분의 견습생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떠나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는 면제품 수출회사에 견습생으로 입사했을 당시, 나는 열여덟 살도 채 안 된 나이였다. 부친은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간 것을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공무원, 교수, 변호사 그리고 의사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부친은 나 역시 대학생이 되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학교 생활이 지겨웠고, 또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부친의 심정을 헤아려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단 함부르크 대학교 법과 대학에 등록을 했다.

  ( 그 당시,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27년경에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은 완벽한 대학생이 되기 위해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출석부에 교수의 확인만 받으면 되었다. 심지어는 출석을 전혀 하지 않아도 별탈이 없었다. 당시는 조교들이 교수를 대신해서 출석 확인을 했는데, 그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쥐어주는 것으로 출석 문제는 충분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

  견습생이 하는 일은 정말 재미없었고, 또한 배울 것도 거의 없었다. 나는 오전 일곱시 반에 출근하여 오후 네시까지 일했고, 토요일에는 정오에 마쳤다. 따라서 내겐 시간이 남아돌았다.

  ( 주말에는 다른 두 견습생 - 그들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지만 회사는 달랐다 - 과 함께 주로 함부르크 외곽의 아름다운 시골길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즐겼다. 밤에는 주로 유스호스텔에 묵었는데, 나는 공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숙박비가 무료였다. )

  나는 주중의 5일 동안은 함부르크의 유명한 시립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 도서관은 내가 근무하는 회사 바로 근처에 있었다. 대학생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15개월 동안 나는 독일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 첫 번째 경험 : 목표와 비전을 가져라 >

  그리고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페라를 관람했다. 그 당시 함부르크 오페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세계 최고 오페라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견습생이었기 때문에 돈이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대학생은 오페라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개막 한 시간 전까지 극장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막이 오르기 10분전까지도 팔리지 않은 제일 값싼 좌석은 대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페라를 관람하던 어느 날, 나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베르디가 1893년에 작곡한 최후의 오페라 폴스타프(Falstaff)였다.

  ( 지금 그것은 베르디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지만, 70여 년 전에는 잘 연주되지 않던 곡이었다. 가수들도 청중들도 모두 그 곡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폴스타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

  내가 태어나 자란 빈은 말 그대로 음악의 도시였던 까닭에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은 오페라를 관람했지만, 베르디의 오페라는 폴스타프가 처음이었다. 그 날 밤 오페라 극장에서 느꼈던 감동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오페라를 관람한 후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유쾌하면서 인생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이 여든 살이라는 나이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는 건강한 사람의 평균 수명도 50세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80세란 나이는 흔한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베르디가 직접 쓴 글도 읽었다. 누군가로부터 "19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유명인이 된 사람이, 엄청나게 벅찬 주제를 가지고 더구나 그 나이에, 왜 굳이 힘든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답변으로 쓴 글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 동안 완벽을 추구해 왔다.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애썼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았다. 때문에 나에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베르디의 이 말을 잊은 적이 없다. 그의 말은 나에게 지울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베르디는 그때 내 나이였던 열여덟 살에 이미 노련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나는 그 때 겨우 면제품 수출사업으로는 성공할 것 같지 않음을 확인한 것 외에는, 장차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있었다. 열여덟 살의 나는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성숙하지 못한 풋내기였고, 그리고 나약했다. 그로부터 15년이 더 지나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나는 내게 어떤 소질이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진실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대에 나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베르디의 그 교훈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나이를 더 먹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살아가는 동안 완벽은 언제나 나를 피해 갈 테지만, 그렇지만 나는 또한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리라고 다짐했다.

  < 두 번째 경험 : 신들이 보고 있다 >

  함부르크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고 있을 그 무렵, 나는 '완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Phidias)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기원전 440년경 여러 조각 작품의 제작을 의뢰依賴 받았는데, 그때 조각한 작품들이 2,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위에 여전히 서 있다.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은 오늘 날까지도 서구 미술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들 그의 작품을 칭송했지만, 정작 아테네의 재무관은 페이디아스의 작품료作品料 지불을 거절했다. 재무관의 거절 사유는 이런 것이었다. "조각들은 신전의 지붕 위에 세워져 있고,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각의 전면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에게 조각 전체 값을, 다시 말해 아무도 볼 수 없는 조각의 뒷면 작업에 들어간 비용까지 청구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 페이디아스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당신은 틀렸어. 하늘의 신들이 볼 수 있지."라고 대꾸했다. 폴스타프를 관람하고 난 다른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항상 그렇게 살지 못했다. 나 역시 제발 신들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한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페이디아스는 내게 어떤 일을 할 때 오직 '신들'만이 그것을 보게 될지라도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쓴 책 가운데 어느 책을 최고로 꼽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웃으며 "바로 다음에 나올 책이지요."라고 대답한다. 웃으며 대답하긴 하지만 결코 농담은 아니다. 나는 베르디가 여든 살이라는 나이에도 늘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오페라를 작곡했던 그때 그 심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비록 지금 내 나이가 폴스타프를 작곡할 당시의 베르디보다 많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쓸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바라건대, 앞으로 나올 책들은 과거에 나왔던 책들보다 더 나을 것이고, 더 중요한 책으로 읽힐 것이고, 그리고 조금이나마 더 완벽하게 될 것이다.

  < 세 번째 경험 :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라 >

  몇 년 뒤, 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곳에서 처음에 나는 증권회사의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이 붕괴되면서 뒤이어 내가 근무하던 증권 회사도 파산을 맞이했다. 그 후 나는 정확히 스무 살이 되는 날에 프랑크푸르트의 최대 신문사에 금융 및 외교 담당 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함부르크 대학에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법과 대학으로 전학을 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 대학에서 저 대학으로 학적을 옮기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사실 나는 법학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하여간 베르디와 페이디아스의 교훈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신문 기자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주제들에 대해 유능한 기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은 알아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신문은 석간이었다. 우리는 오전 여섯시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오후 두시 반, 그러니까 최종편집판이 인쇄에 들어가면 퇴근했다. 나는 남은 오후 시간과 밤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와 국제법, 사회 제도와 법률 제도의 역사, 일반 역사, 재무 등에 관해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차츰 나만의 공부법도 개발하게 되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나는 3년 또는 4년마다 다른 주제를 선택한다. 그 주제는 통계학, 중세 역사, 일본 미술, 경제학 등 매우 다양하다. 3년 정도 공부한다고 해서 그 분야를 완전히 터득할 수는 없겠지만, 그 분야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60여년 이상 동안 3년 내지 4년마다 주제를 바꾸어 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이 방법은 나에게 상당한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시각 그리고 새로운 방법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공부한 모든 주제들 각각은 서로 상이한 가정을 하고 있었고, 또한 서로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었다.

  < 네 번째 경험 : 자신의 일을 정기적으로 검토하라 >

  나 자신을 지적(知的)인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그리고 보다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경험담에 보태서 다음에 할 이야기는 당시 유럽의 주요 언론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편집국장에게서 배운 것이다. 당시 신문사의 편집국은 대부분 아주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도 스물 두 살에 세 명의 편집국장보(編輯局長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특별히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일간지의 일류 기자감이 아니었다. 1930년경의 유럽에는 그런 직위에 어울리는 사람들- 35세 전후의 유능한 기자 출신 -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편집국장보 같은 높은 직위에 나 같은 젊은이가 대신 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50대였던 편집국장은 부하직원을 훈련시키고 또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다. 그는 매주 우리가 쓴 기사를 가지고 우리 각자와 함께 토론을 벌였다. 일 년에 두 번씩, 정월 초하루 바로 다음날과 6월에 시작되는 휴가철 바로 직전에 우리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하루 종일을 지난 6개월간 우리가 했던 일에 대해 토론하면서 보냈다. 편집장은 언제나 우리가 잘한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잘하려고 노력한 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가 잘하려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분야를 검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했거나 또는 실패한 일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 모임의 마지막 두 시간 동안에는 앞으로 6개월 간 해야 할 일을 계획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개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 각자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을 논의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 각자는 다음 6개월 간의 새로운 업무 계획과 학습 계획을 편집국장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나에게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그 회합이 무척 즐거웠지만 신문사를 떠난 뒤에는 곧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이미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을 때, 나는 지나간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1940년대 초였는데, 당시 나는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업에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으며, 또 몇 권의 주요한 책들도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프랑크푸르트의 편집국장에게서 배운 방법이 기억났다. 그 이후로 나는 줄곧 여름만 되면 2주일간 시간을 따로 할애해서 지난 1년 동안 내가 한 일을 검토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내가 비록 잘했지만 더 잘할 수 있었거나 또는 더 잘했어야만 하는 일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잘못한 일, 마지막으로 내가 했어야만 했는데도 하지 않은 일을 차례로 검토한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컨설팅 업무, 저술 활동 그리고 강의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결정하여 계획을 수립한다.

  이처럼 매년 8월에 수립하는 계획에 맞추어 충실하게 생활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나는 그 계획을 통해 베르디의 교훈, 즉 '완벽을 기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살고 있다. 비록 '그 완벽이란 것이 늘 나를 피해 갔고', 또 지금도 나를 피해가고 있지만 말이다.

  < 다섯 번째 경험 : 새로운 일이 요구하는 것을 배워라 >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1933년에 나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처음에는 규모가 상당히 큰 보험 회사에서 증권분석사로 일했고, 1년 후에는 규모는 작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개인 은행의 경제 분석가 겸 3명의 시니어 파트너(senior partner)의 수석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 명은 그 은행의 창업자로서 70대의 노인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30대 중반이었다. 처음에는 젊은 두 사람 밑에서 일을 했는데, 3개월 가량 지났을 무렵 창업자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이 회사에 입사할 때 난 자네를 눈여겨보지 않았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네. 그런데 자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군. 그뿐만 아니라 자네는 보통 이상으로 어리석군." 나는 젊은 두 동업자로부터 날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칭찬을 받았던 터라 그 창업자의 갑작스런 비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만큼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네가 보험 회사의 증권분석가로서는 일을 썩 잘했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만약 자네가 증권 분석 업무를 계속하길 바랐다면 우리는 자네를 이리로 데려오지 않고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그냥 두었겠지. 그런데 지금 자네는 시니어 파트너들의 수석 비서인데도 여전히 증권분석사 시절에 하던 것처럼 일하고 있더군. '지금' 자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다시 말해, 자네의 '새로운' 직무에서 효과적인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내심 그 노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의 행동 방식과 내가 하는 일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 후 나는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새로운 일을 맡은 지금 내가 효과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번 달랐다.

  지금까지 나는 40년 넘게 기업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는 여러 나라의 여러 조직과 함께 일을 했다. 내가 관찰했던 모든 조직에서 인적 자원의 최대 낭비는 단연코 승진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승진을 하여 새로운 직무를 맡은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완전히 실패했다.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도 실패도 아닌 보통 수준에 머물렀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했다.

  그러면 10년 내지 15년 동안 유능했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무능해져야만 했는가? 내 경험을 통해 보건대, 그 이유는 60여 년 전에 내가 런던의 은행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그들도 똑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직무를 맡은 뒤에도 과거에 이미 성공을 거두었던 일 그리고 그들을 승진시켜 준 그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정말 '무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해야 할 일을 놔두고 다른 부적절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수년간 진정으로 효과적인 사람들인 나의 고객-특히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진정으로 효과적인 지식 근로자들-에게 습관처럼 "당신이 목표를 달성하는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들은 보통 내가 그런 것처럼,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그들의 상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 즉 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로 하여금 새로운 직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그 은행의 창업주와 같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원인을 돌리고 있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 볼 때는 그 누구도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터득하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을 가르쳐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한 번 그것을 배우고 나면 다시는 잊지 않게 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직무에서 성공하게 된다. 새로운 직위에서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뛰어난 지식이나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직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직위에서 요구하는 일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과 직무 그리고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 여섯 번째 경험 : 피드백 활동을 하라 >

  1937년에 나는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꽤 많은 세월이 흐른 1945년경에 나는 근대 유럽의 초기 역사, 특히 15∼16세기의 역사를 3년에 걸쳐 연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연구를 통해 나는 근대 유럽에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두 개의 조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카톨릭이 지배하는 남부 유럽의 예수회였고, 다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북부 유럽의 칼뱅파 교회였다. 1536년대 독자적으로 창설된 두 교단은 공교롭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둘 다 아주 초창기부터 똑같은 학습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회 신부나 칼뱅파 목사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예를 들면 어떤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자신이 예상하는 결과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9개월 후에는 실제 결과와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를 비교해 보는 피드백 활동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잘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장점은 무엇인지를 신속하게 알려준다. 그것은 또한 그가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지 그리고 어떤 습관을 바꿔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그가 소질이 전혀 없는 분야가 무엇인지 그리고 잘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준다.

  나는 이 방법을 50여 년 동안 꾸준히 실행해 오고 있다. 피드백 활동은 우리의 장점이 무엇인지 밝혀주는데, 이 장점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점은 한 개인이 개선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또한 그것은 한 개인이 할 수 없는 것, 심지어는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백히 밝혀준다. 자신의 장점을 안다는 것, 그 자신을 어떻게 개선해야할지를 안다는 것, 그 자신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를 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것들이 바로 지속적 학습의 관건이다.

  < 일곱 번째 경험 :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라는가 >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경험을 더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의 개인적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내가 뉴욕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인 1949년 크리스마스에 73세의 부친이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우리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오셨다. 연말을 가족과 함께 보낸 부친과 나는 1950년 1월 3일에 부친의 오랜 친구였던 유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를 방문했다. 그때, 나의 부친은 이미 은퇴를 했지만, 슘페터는 66세의 나이로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누리면서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또 미국경제학회(American Economic Association)의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1902년에 나의 부친은 오스트리아 재무성에서 젊은 공무원으로 근무했고, 대학에서 틈틈이 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부친은 당시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던 열아홉 살의 슘페터를 알게 되었다. 부친과 슘페터만큼 서로 다른 사람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슘페터는 활기차고, 당당하고, 외향적이고 그리고 우쭐대기 좋아했다. 반면에 나의 부친은 조용하고, 예의바르고, 절대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겸손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오래도록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슘페터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66세의 나이로 하버드에서 강의하는 마지막 한 해를 보내고 있던 그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두 노인은 지난날을 함께 회상하면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 다 오스트리아에서 자랐고 또 그곳에서 일했으며, 종국에는 미국으로 왔다. 슘페터는 1932년에, 부친은 그보다 4년 늦게 왔다.

  부친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껄껄 웃더니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조지프, 자네는 아직도 자네가 죽은 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가?" 슘페터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옆에 있던 나까지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슘페터는 30세 무렵에 그의 위대한 경제학 저술들 가운데 최초의 두 권을 출판했는데, 그 당시 누군가가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유럽 미녀들의 최고 연인, 유럽의 최고 승마인,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고 경제학자로 기억되기 바란다."라고 대답하여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슘페터는 부친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네. 그 질문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하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교사로서 기억되길 바란다네." 슘페터는 말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부친의 놀란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돌프, 이제 나도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어. 진정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책이나 이론이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았단 말일세." 부친이 슘페터를 만나러 간 것은 그가 병중이었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슘페터는 우리의 방문을 받은 닷새 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때의 대화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대화에서 내가 배운 것은 세 가지 이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늙어가면서 그 대답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것은 차츰 성숙해 가면서 그리고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바뀌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꼭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한 가지는,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님들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전 지금보다는 좀 더 다른 생각과 비전vision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중에 보면 '무엇이 성공인가'에 대한 작은 대답이 나옵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기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류시화님이 인용한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입니다. 누구나 큰 재력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최고 스타, 최고위 자리에도 모두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성공한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자주, 많이 웃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면 됩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회사에 처음 출근하던... 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사랑하는 이를 처음 만나던... 그 심정으로 이 아침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그럼... 님들의 하루가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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