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

조회 수 3142 2002.06.01 22:03:13
토미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文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十九 문文 반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六 문文 삼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十九 문文 반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十九 문文 반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시인의 '가정'이라는 시詩를 적어보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문文'이라는 단어의 뜻은 신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대략 1文은 약 2.4cm라고 합니다.

  제가 이 시詩가 생각이 난 이유는 아버님의 생신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이 아버님이 생신이었는데, 동생과 같이 일본에 있는 관계로 챙겨드리지 못하고 뒤늦게 지금에야 챙겨드렸습니다.
  물론 생신선물도 드렸죠.
  백화점에 갔더니 요즘 어른들이 신기에 편한 '녹차 구두'라는 구두가 나와 있더군요.
  여름에 발 냄새 제거에도 좋고, 또 나이가 드실수록 깔끔해 보여야 보는 자식들 마음이나,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도 편할 거 같아서요.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절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셨던 교회 장로님이 계셨는데, 전 철없게도 그 분만 오면 숨어버렸습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 분의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나이 드신 분 특유의 냄새... 그 냄새 때문에 제가 싫어했는데, 문득 백화점에서 그 생각이 나더군요.
  이제 아버지도 젊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이요.
  남동생은 제 그런 마음을 아는지 어느 새 화장품 코너에 가서 남성용 화장품을 사오고 말입니다.

  어제 밤에는 늦깎이 여성학자로, 베스트셀러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의 저자로, 인기 가수 패닉의 멤버 이적의 엄마로 유명세를 치르며 숨돌릴 틈 없는 바쁜 삶을 살아왔던 저자 박혜란이 '여자의 나이와 몸'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쓴 '나이듦에 대하여'란 산문 모음집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남는 구절을 옮겨 보겠습니다... 솔직히 이 글 옮기면서 '어머니'라는 단어가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싫어도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나이듦은 늙어감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늙어 가면서 왜 그렇게도 늙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할까. 가까워져 오는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젊음을 찬미하는 데 너무 바빠서 늙음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예우도 못할 만큼 인색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의학의 기술을 빌리건 심리적 최면을 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젊음을 자꾸 늘여 가다 보면 어느 날 늙음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꿈꾸는 지도 모른다. 늙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환상적인 꿈.

  '나도 이제 늙었어.'를 되뇌는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직 안 늙었어.' 또는 '다 늙어도 나만은 안 늙어'라는 묘한 자만심이 깔려 있는 거다. 때문에 입으로는 솔직하게 자신의 늙음을 고백하는 듯하지만 나의 귀는 상대방이 누구이건 간에 그로부터 '무슨 말씀을? 당신은 젊어'라는 소리를 듣고싶어한다. 게다가 그것이 절대로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거라고 애써 믿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곱게 늙으셨어요?

  나보다 한참 젊은 여성들로부터 날씬하다든가 젊다든가 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그게 아무리 입에 발린 치레라고 해도 기분이 꽤 괜찮은 노릇이다. '아유, 그 거짓말 참 듣기 좋네."라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입이 헤벌쭉해지고 축 늘어졌던 사지에 파르르 생기가 오른다.(이 쯤 되면 나도 갈 데 없는 공주병 환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얼마 전 일반버스에서의 경험은 충격적이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팍 전 파김치 상태로 의자에 늘어져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몸을 내 쪽으로 숙여 오며 속삭였다.
  "이 적씨 어머니시죠? 어쩌면 그렇게 곱게 늙으셨어요?"
  이 적(나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이 동준. 대학 4학년 때 가수로 데뷔했다)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그 여성은 스물 여덟 살이며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그 또래답게 환한 표정에 당당한 태도가 돋보이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5분 남짓 동안 내 귓속에서는 계속 '곱게 늙었다.'는 말이 맴돌았다. 아니, 그냥 "어쩌면 그렇게 고우세요?"라고 끝내면 어때서 굳이 '늙었다.'는 말을 보태는 거지? 괘씸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늙음은 추함이고 악함이고 약함이고 심지어는 죄라고 배워왔다. 더구나 여성의 경우는 훨씬 더 심했다. 그 많고 많은 이야기책들은 한결같이 젊고 예쁘고 착한 소녀를 괴롭히는 늙고 못생기고 못된 여자들을 그려왔으니까. 백설공주도 늙으면 마녀가 된다! 여자들이여, 늙지 말지어다.
  때론 자신은 나이에 초연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이 늙어감은 인정하지 않는다. '나이는 들었지만 나는 젊다.' 도대체 늙음이 뭐길래.
  결국 늙음을 맹렬히 부정하느라고 정작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는 하나도 못하면서 우린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통고받는 순간의 그 느낌이라니. 그 충격적이고도 착잡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이 달리 보이네

  사노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정의 대상이 될 때도 생기나 보다. 전 같으면 남에게 동정의 대상으로 비친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해서 펄쩍 뛰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니? 하고 빙그레 웃는 것으로 그만이다. 그러고 보면 기가 꺾였다는 지적은 정확한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크게 서글프지는 않다. 몸이 안 좋아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단순히 몸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 또 몇 년 나이가 들어서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난 치열하게 살지 않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고 크게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조그맣더라도 세상에 왔다간 자취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치열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조용히 뒤돌아보니 나는 치열함과 분망함을 혼돈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 인생은 그저 분망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격 자체에 한 가지를 붙들고 매진하는 어떤 열정 같은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해야 할까. 제발 참으라고 몸이 막고 나선다. 나를 위해서 좀 느슨하게 살아 달라고. 꼭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내가 몸이 안 좋다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다짜고짜 '아, 이젠 좀 인간적이 되었겠네.'라며 신난다는 듯이 크게 웃던 친구가 있었다. 전에는 너무 힘이 넘쳐서 비인간적으로 보였다나 뭐라나. 나를 만나면 괜히 기가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은 되게 기분이 나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긍이 간다. 나 역시 여전히 혈기왕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나하고 다른 인종처럼 보이니까.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진다는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가 치열하게 사는 대신 멀찌감치 물러나서 조용히 구경만 해도 뭐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다. 또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건성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서 좋다.

  밖에서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가 갑자기 가여워집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가엾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라는 것이 알지만... 저자의 이 말이 절 불효자로 만듭니다.

  "아줌마들 3대 질병이 자궁, 허리병, 홧병이야. 이번에 자궁 수술하면서 보니까 왜 그리 '빈궁마마'들이 많은지. 산후조리 잘못해서 허리병은 기본이고 고부관계가 주원인인 홧병은 결혼 10년차나 40년차나 똑같애.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 하지만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병 끼고 산다고 보면 돼."

  '우리의 삶은 대하 드라마다. 해방 전쟁 가난…그 속에서 애 낳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시부모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훌쩍 늙어버린 지금, 자식들과는 아예 대화가 안 된다. 환갑이 넘어서까지 80, 90 넘은 시부모 모셔야 하느냐 한탄하면 효자로 소문난 남편은 일상적인 히스테리라며 무시해 버린다. 너그러운 시어머니이고 싶지만 요즘 젊은것들은 해도 너무 한다. 남편은 또 어떤가, 왕년에 출세를 했건 말건 제 손으로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줄 모르는 생활 무능력자들. 오죽하면 팔자 좋은 60대 여자는 유산 많이 남기고 남편이 일찍 죽은 년이란 농담까지 나왔을까.'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제대로 올 거 같지 않습니다.
  그냥 미안해서 말입니다.
  그럼... 쉬세요.


댓글 '5'

현경이

2002.06.01 22:07:49

저 시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참 많은 생각을 했던거 같네요.. 엄마, 아빠... 잘해드려야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좋은 밤 되세요

jwsarang

2002.06.02 01:54:12

내 자식키우기만 하며 날 낳아준 이들을 잊고 살지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어떡하나 하기만 하지요. 난 참 나쁜 딸입니다. 지우가 부모님을 가장 아낀다지요. 참 보기드문 아가씨예요.

sunny지우

2002.06.02 16:25:50

토미님은 참 효자이신 것 같습니다. 또한 토미님이 결혼하시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가실가까? 궁굼하기도 하구요.여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니까요. 장남이신 것 같은데 고부간의 갈등이 생겨도 잘 중재해주실 것 같아요. 부모님에 대한 이해도 깊으시니까요. 그분이 어

sunny지우

2002.06.02 16:27:59

어떤분이 되실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 하실 것 같아요.

세실

2002.06.03 00:45:53

저도 써니지우님과 같은 생각이랍니다. 어서 아름다운 토미님의 짝이 나타나기를...지금쯤은 잠이 드셨겠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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