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가는 대로 써 본 글...

조회 수 3073 2002.11.01 22:26:24
토미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 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며,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틱낫한'의 <화(Anger)>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니 화가 나는 일,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그 화를 다스린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 이웃의 행복과 불행이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요 며칠 모든 것이 싫어지고 힘들어졌습니다... 이 천박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런 저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글이 있어 옮겨 적어봅니다.
  소설가 심상대님의 글입니다.

  범우사에서 간행한 범우문고에는 에세이문고가 포함돼 있다. 이 문고에는 정말 주옥같은 책이 그득하다. 외국인의 책도 있지마는 대개 우리나라 문학인의 수필집으로, 이제는 세상을 떠난 분의 책이 대부분이다. 한용운의 『명사십리』,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이상의 『권태』, 이희승의 『딸깍발이』,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변영로의 『명정 40년』, 조지훈의 『동문서답』, 김용준의 『근원수필』 등의 고전이 다 이곳에 함께 있다.

  내게는 이 문고본이 여러 권 있다. 정가는 280원부터, 판본은 1976년 판부터 근래까지로 대부분 얼룩이 지고 헤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남루하다 하여 버리지 아니하고 지난 세월 하숙방과 자취방, 신혼방과 월세방으로 이끌고 다녔다. 이들이야말로 나의 성경이자 교과서였으며, 어린 나의 수신(修身)을 담당하고 야망을 부추기던 숨겨진 스승이었다. 그 가운데 한 권, 소설가 이태준의 『無序錄』은 내가 늘 머리맡에 꽂아두고 읽고 또 읽는 책이며, 문학과 문장을 위한 강의시간에 교재로 활용하기도 하고 강연에서 곧잘 인용하는 책이다.

  내가 본시 천성이 경박하고 사나워 남을 상하게 하는 만큼,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남에게 상처를 받는 일이 또한 흔하다. 제가 무디면 남의 허물도 보이지 않을 터이고, 제가 귀천(貴賤)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남 또한 귀한지 천한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심한 천성과 보잘것없는 수양으로 자주 상처를 입는다. 대개는 세상의 속물근성이나 기회주의, 비겁한 처신과 배금주의에 대한 숫된 저항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무서록』을 꺼내든다. 그러면 이 책은 천격(賤格)을 양양히 과시하는 천출(賤出)들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나의 편이 되어 함께 비웃어주는 것이다. 이럴 때면 이 책은 나의 동료이자 벗이고, 애인이며 세상 천지 유일한 이해자로서 나에게 귀족의 품격을 부여한다.

  내가 좋아하여 늘 떠벌이고 다니는 말 한 가지가 있다. "예술가는 별과 같아서 나타나는 그 자리가 곧 성좌(星座)의 일 부분이다"라는 말이다. 이 책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에 나오는 이 말의 원형은 다음과 같다.

  "문단의 자리는 임자가 없다. 좋은 작품을 쓰는 이의 자리다. 흔히 지방에 있는 신진들은 자기의 지반(地盤)이 중앙에 없음을 탄(歎)한다. 약자의 비명(悲鳴)이다. 김동리는 경주, 최명익은 평양, 정비석은 평북에 있되 빛난다. 예술가는 별과 같아서 나타나는 그 자리가 곧 성좌의 일 부분이다. 중앙의 우선권은 잡문(雜文)에 밖에 없는 것이다. 잡문을 많이 써야 되는 것은 중앙인들의 차라리 불행이다. 잡문에 묻혀 썩는 사람들이 중앙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지 멀리서 바라보라."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은 내 문학관을 형성하는 데도 많은 기여가 있었다. 산술적 수치와 대중적 명성으로 문학의 질을 분별하는 이들에 비하여 창조적 자의식을 중시하는 예술가를 지향하는 내 태도 말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종교는 윤리학이기보다는 차라리 미신이기를 주장한다. 문학은 사상이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 철학이 아니라 예술인 소이(所以)다. 감정이란 사상 이전의 사상이다. 이미 상식화된, 학문화 된 사상은 철학의 것이요, 문학의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평론가'라는 글은 평론가더러 보라는 글이 아니라 나와 같은 창조적 예술가를 지향하는 소설가에 대한 경계론이다. '평론가'라는 글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평자(評者)들이 소설에 대한 준비지식으로 읽은 이론을 하물며 작자(作者)들이 안 읽을 리 없다. 그만 교양은 작자에게도 있으려니 여겨 마땅하거늘 너희가 어디서 이런 방법론이나 이론을 보았겠느냐는 듯이 사뭇 소설작법식으로 덤비는 평가(評家)가 더러 있다. 나는 우리 작가들에게 말한다. 평가가에게서 비로소 작법이나 방법론을 배워 가지고 소설을 쓰려는 그 따위 게으르고 무지한 자라면 빨리 작가의 위치에서 물러가야 할 것이다. 이론은 알되 이론대로 못 되는 것도 작품이요 이론의 표본적인 작품일수록 좋은 작품이 아닌 경우도 더 많기 때문에 고의로 이론을 무시해야 되는 것도 소설이다. 소설의 산실은 원칙적으로 비밀인 것이다."

  얼마 전에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이어령 선생님이 자신에 대한 지칭을 문제삼는 TV토론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은 '천재'도 아니요 '노력가'도 아닌 까닭에 '창조자'라 불러주기를 바란다는 주문이었다. 그 말에 관한 내 뜻도 그렇다. 내가 소설의 백미를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 주장하는 저간의 내막이 그러하다.

  '이성간 우정'이라는 글도 이 책에 실려있다. 이 글을 읽으면 한말 선비의 후예인 이태준이라는 소설가의 선진하고 통쾌한 애정관을 만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횡행하는 교만한 윤리관과 허울좋은 도덕을 한 칼에 베어버리는 선대인(先代人)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구태여 이성간의 우정을 맺을 필요가 없다. 절로 맺어지면 모르거니와 매력이 있다 해서 우정을 계획할 것은 아니다. 매력이 있는데 우정으로 사귀는 것은 가면이다. 우정은 연정의 유충(幼蟲)은 아니다. 연정 이전 상태가 우정이라면 흔히 그런 경우가 많지 만은, 그것은 우정의 유린이다."

  이 얼마나 정직한 일갈(一喝)인가. 내가 오늘 세상의 그 어떠한 지식과 담론, 교양과 관습에도 굴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는 아마 어린 시절 이러한 책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책에서 만나는 예술론이 아니더라도 창조적 인간은 언제나 고독한 이단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진리란 가변성을 포함한 당대 다수의 폭력에 불과하다. 나는 독자를 위한 글품팔이도 아니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지식인도 아니므로 언제나 세상의 경박함과 몰이해, 그리고 매너리즘과 길항(拮抗)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이 책을 꺼내들 수밖에 없음은, 또한 내가 감정을 가진 인간이며 그 감정에 충실한 창조자인 때문이다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제 방을 나서다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동생을 기다리다 소파sofa에 기대어 잠이 드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제 방에 있는 담요(...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국제선을 타게 되면 담요를 항공사별로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를 가져다 덮어드리면서 전에 제가 인용한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 제목이 '주제 없이 쓰는 네 번째 글...'에 나온 시인 거 같습니다.

     "꽃 좋아하면
     눈물이 많다더라"
     그러면서도
     봉숭아 함박꽃 난초 접시꽃
     흐드러지게 심으셨던
     어머니

     볕 좋은 날이면
     콩대 꺾어 말리시고
     붉은 고추 따다 널어두고
     풀기 빳빳한 햇살 아래
     가을 대추도 가득 널어 말리시며
     잡풀 하나 없이 다듬느라
     저문 날을 보내시던
     고향집 마당

     이제는 와스락와스락
     마른 대잎만 몰려다니며
     잊혀진 발자국 더듬어가고
     "내 죽으면
     이 지섬 다 어쩔꼬"
     어머니의 근심이
     마당 곳곳에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봉숭아, 함박꽃, 콩대, 붉은 고추, 가을대추, 이름만 들어도 왈칵 그리움이 솟구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가을 고향집 마당에 구부정하게 앉아, 붉은 고추를 다듬었을 어머니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버지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울컥 눈물이 날 정도로 그 분들이 보고 싶습니다. 구부정한 모습의 그 분들이 보고 싶습니다.

  날이 밝으면 아버지와 어머님이 시골에 가십니다.
  시골에서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있거든요.
  아마 가신 김에 성묘까지 하고 오실 것 같은데, 마음 약하신 제 아버님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제가 아직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못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에 면목이 서지 않아서요.

  날이 춥습니다.
  며칠 뒤에는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거 같습니다.
  그럼... 추운 날 모두 건강하시고, 푹 쉬세요.


댓글 '2'

바다보물

2002.11.02 00:07:58

토미님 나이 드신 부모님만 보면 싸아~ 해오는 마음을 어쩔수가 없네요 좀더 잘해드리고 싶고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은데.....그래도 아직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는걸 ....좋은 꿈 구세요 토미님도 감기 조심하시구요

세실

2002.11.02 08:35:25

참 정이 많고도 깊은 분 같아요, 때론 풀려나간 실타래 끊는것도 필요한데.... 살뜰하고 따뜻하고 손맛좋은 아릿따운 여성 어디없나요? 지금 토미님 바로 옆에서 지켜볼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눈을 크게 떠보시라눈~~ 행복한 주말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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