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5] 녹차향

조회 수 3929 2003.05.20 12:13:00
소리샘
그즈음.. 나도 상혁이도 우리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믿음이 깨진다는 것이 둘 사이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쨌든 난 상혁이에게 거짓말을 했고..
상혁이도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면서 우리의 대화는 어색하게 겉돌고 있었다.
하지만 상혁인 그때까지 나와 이민형씨와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예전과 달라진 것처럼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소홀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그 이유가 자신이 원인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상혁이는 나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하루종일 상혁이의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야.. 그냥 그런 날도 있지 뭐.. 하고 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모든 게 삐걱이는 느낌이었다.

상혁이와의 저녁식사..
민형씨 얘길 해야한다.. 해야한다.. 하는 생각에 음식이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입에 집어넣었다.
해야하는데.. 더 늦기 전에.. 꼭 해야하는데..
하지만 아무 얘기도 못한 채 한시간여를 보내고 말았다.
[어.. 정유진씨! ]
김차장님이었다. 마르시안의 직원들과 술자리를 갖는 모양이었다.
순간.. 그들 뒤에 민형씨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는 오지 않았다.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들의 대화에서 혹시나 이민형씨의 이름이 나올까.. 그걸 상혁이가 들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불편해 보였는지 상혁인 나가자고 했고.. 내가 먼저 레스토랑을 나왔다.
계산을 하느라 뒤늦게 나온 상혁이의 얼굴이.. 약간 딱딱해져 있었다.
차안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에도 상혁이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유진아.. 너 요즘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니..?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실은.. 그래... 너한테 말하지 못한게 있어.. 이민형씨.. 그 사람이...
하지만 내 입에선 마음과는 반대로 숨기는 게 없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응...? 그런거 없..어.. ]
[모르겠다.. 요즘.. 니가 변한 것 같이 느껴져..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니..? ]
[상혁아... ]
[아냐.. 니가 말하지 못한게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미안하다. 오늘 내가 좀 예민해졌나봐. 갈게.. ]
상혁인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차를 타고 가버렸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상혁이.. 뭔가를 알고 있는거야..
아까 레스토랑에서 뭘 들었던 걸까..? 이민형씨의 이름을.. 그들에게서 들은 건가..
아까 상혁이가 물었을 때 다 얘기 할 수도 있었는데.. 왜 또 거짓말을 한걸까..
두렵니..?
사실을 다 됐을 때.. 상혁이의 반응이 두려운거야..?
상혁이가 그 사람과 일하는 걸 싫어 할까봐.. 그래서 일을 그만 두라고 할까봐..?
그 사람을.. 못 보게 될까봐..? 그래.. 그게 두려운 거겠지..
솔직히.. 그게 제일.. 두려운 거겠지..
후... 하지만 이건 아냐.. 이러면 안돼..
힘들어도.. 상혁이에게 얘기 해야해..
언젠간.. 내가 아니더라도 상혁이도 알게 될꺼야.
그래.. 내일.. 내일 얘기하자. 꼭 얘기 해야해..

회사에서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아언니의 물음에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애꿎은 전화기만 들었다 놨다 했다.
저녁 즈음.. 상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압구정 비바체.. 7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이른 시간에 약속장소로 갔다.
상혁이가 오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상혁이.. 내 얘길 들으면 얼마나 놀랄까..
나한테 많이 실망하겠지..?
지난 10년도 모자라.. 아직도 내가 준상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결국..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이민형씨 때문이 아니라.. 준상이 때문인 것을..
후.. 난 참 나빠..
상혁이한테 이러면 안되는데..
도대체 상혁일 얼마나 더 준상이와 싸우게 만들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자란거니.. 지난 10년으론 모자란거야..?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물 컵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유진아.. 많이 기다렸어? ]
[아니.. ]
[우리 배고픈데 먼저 음식부터 시키자. ]
[그래.. 저기.. 상혁아.. 나 있지.. ]

[어머! 유진아. 상혁아. ]
우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앞에.. 민형씨와 채린이가 서있었다.

심장 소리만 커다랗게 귓가를 울렸다.

[유진씨.. 여기서 보게 되네요? 그저께 추위 많이 타는 것 같았는데.. 괜찮아요? ]
난 어쩔 줄 모르고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상혁이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테이블위의 물컵만 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넷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내 생에 이렇게 당황스러운 만남이 있었을까..
나에겐 바늘방석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상혁인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얼굴로 나와 민형씰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아까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아직 유진이가 아무 얘길 안 한 것 같애서 말 안 했어.
사실은.. 이번에 유진이가 맡은 스키장 공사 책임자가 민형씨야. ]
그제서야 모든 걸 알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상혁이의 눈빛을 애써 피했다.
민형씬 내가 자신과 일을 한다는 것을 상혁이가 몰랐다는게 이상하다는 듯 의아해했다.
[상혁씨가 몰랐다는게 이상하네요? 유진씨가 왜 얘길 안했을까요? ]
[그러게..? 유진이 얘가 음흉한 데가 있다니까? 정말.. 너 왜 그랬니? ]
왜.. 그랬냐구..?
딱히 변명할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어쩌면 좋을까..
[그동안 서로 그런 얘기 할 새가 없었을 뿐이야. ]
상혁인 담담하게 내 대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고마우면서도.. 너무나 미안했다.
지금 마음 속으로 얼마나 실망하고 있을까..  
그 뒤로.. 나와 상혁이의 결혼 얘기가 오가고.. 또.. 무슨 얘기들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 이었고..
나중에 상혁이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그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채린이와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
[파리에서.. 그때 민형씨가 잠깐 프랑스에 공부하러 온 적이 있었거든..
그땐 친구 만나러 잠시 온 거였지. 아마? ]
[처음엔 채린이가 얼마나 이상했다구요.. 계속 제 얼굴만 쳐다보는 거에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국 어디서 살았는지..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더라구요. ]
순간.. 우리 셋의 얼굴엔 긴장감이 흘렀다.
[그게... 채린이가 왜 얘기 안 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
상혁이가 준상이 얘기를 하려는 듯 했다.
난 순간 당황해서 앞에 놓인 접시를 엎고 말았다.
옷이 흠뻑 젖어버렸고.. 난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옷에 묻은 음식찌꺼기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화장실 벽에 힘없이 기대섰다.
금세 주루룩 흘러내릴 것처럼 잔뜩 고인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냈다.
후.. 이게 무슨 꼴이야..
상혁이가 준상이 얘기하려는 것에 이렇게 놀라버리다니..

준상이.. 준상이..

아직도 그 이름은 10년이나 지난 뒤에도.. 날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지레 놀랐다는게 맞는 것 같다.
준상이의 얘기를 듣는 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아니까..
준상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바라보면서.. 죽은 준상이의 얘기를 한다는 건 견딜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준상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이렇게 심장이 내려앉았던 것일까..

옷의 음식찌꺼기를 대충 털어내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눈가가.. 빨갛네..
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상혁이가 출입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민형씨와 채린인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나갔어.. 가자. ]
말없이 상혁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색하게 그들과 헤어지고.. 상혁이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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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글방펌













댓글 '4'

2003.05.20 14:08:28

올만에 ㄴ느끼는 두근거림이군요.
잘 읽어서요. 계속 기다릴께요....쭈욱~~

온유

2003.05.20 19:38:36

10년을 한결 같이 유진이를 아껴준 상혁이.......
어떡해요~~~우리 유진인 준상이 밖에 없다네요~~
"사랑없으면 소용이 없고,아무것도 아닙니다"
불쌍하네요.......상혁이............

소리샘님 감사합니다.

★벼리★

2003.05.20 22:45:43

글 잘읽고 갑니다..^^

달맞이꽃

2003.05.21 09:28:04

소리샘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유진이 이야기는 계속되는군요 ..겨울연가 보면서 상혁이가 남자 답지 못하다는 생각을했었는데 여유를 갖고 다시보니 상혁에 마음이 헤어려집니다 ..사랑이란 두사람 마음이 일치했을때 아름다운 사랑이 된다는걸 상혁이도 알터인데 .......사랑앞엔 10년에 사랑도 부질없군요 ..후후후유진에 마음이 준상이에게로 향해 있는이상 상혁이는 많이 외로울것 같군요 ..일방적인 사랑은 언제나 그사람으로 하여금 상처만 주니까요 ..소리샘님 ..올려주신 글 잘 읽고갑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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