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0] 녹차향

조회 수 3129 2003.05.27 01:05:44
소리샘
스키장에 도착했다.
김차장님이 특별히 우린 제일 좋은 방으로 잡았다며 우릴 방으로 안내했다.
그때 바로 앞방에서 그 사람이 나왔다.
[어디 갔나 했더니 방에 있었구나? 시간도 남는데 우리 차나 한잔하러 갈까요? ]
[좋죠? 가자. 유진아. ]
[아니..난 그냥 방에 있을래. 언니 혼자 갔다와.. ]
[그래? 그럼 우리끼리 가죠. ]
후... 아무래도.. 그 사람 얼굴을 보는 게 쉽지가 않다.
맘이 무겁다.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활짝 제쳤다.
창 밖으로 펼쳐진 하얀 눈에 햇빛이 반사되어 한꺼번에 방안으로 화악 쏟아져 들어온다.
기분까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김차장님.. 말만이 아니고 정말 좋은 방으로 잡아 주었나보다.
한눈에 스키장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슬로트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는 사람들.. 다들 즐거워 보인다.
갑자기 찬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면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릴 것 같다.
    
잠시 밖을 거닐다가 약속된 회식장소로 갔다.
식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아저씨가 쾅..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서신다.
[여그 계신 분들은 가방끈이 길어서 잘 모르겄지만.. 내가 노가다 짬밥이 20년 하고도 8년이여.
근디 저 조막만한 것들한테 잔소리 들으며 일해야 한다는 거여?
여그가 애들 소꿉장난 하는데도 아니구 말여. ]
훗.. 아저씨 여전하시네.. 그럼 나도 인사드려야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점짓 화가 난양 벌떡 일어섰다.
[저희도 소꿉장난 할 생각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싫으신 건가요? 아니면 여자라서 싫으신 건가요? ]
[아니.. 어디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말대꾸여?
내가! 노가다 짬밥 28년 만에 저런... ]
[버르장머리 없는 년은 처음 이시라구요? ]
일순간 회식자리는 쥐죽은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훗... 아저씨와 난 눈짓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레파토리 좀 바꾸세요. ]
[흠.. 할말 다하는 거 보니께 인자 노가다 십장 냄새가 쬐금 나는구먼.. ]
[아저씨도 여전하시네요. ]
[흠흠.. 사람이 변하는 거 봤냐..? ]
다시 회식자리는 화기애애해진다.
아저씨와의 첫 만남 때의 말싸움이 우리끼리의 인사방식이 된지 오래다.

[자.. 술 한잔 받으시죠. ]
공사 관계자 한 명이 나에게 술을 권했다.
[에이.. 콜라로 무슨.. 술 잘 하게 생겼는데.. ]
언제나 그랬듯 아저씨가 옆에서 내 잔을 한숨에 비워내신다.
[유진인 술 못혀.. 술만 들어가면 그냥 정신을 잃어버리니께..
유진이 야가 못 하는게 딱 세 가지가 있어. 술. 거짓말. 그리구 서방질이여.. 허헛
내가 옛날에 야 술 먹고 죽을 뻔한 얘기 해줄까? ]
아휴.. 또 그 얘기..
[아휴.. 알았어요. 아저씨.. 노래 부르면 되잖아요. 노래.. ]

늦은 밤까지 계속된 회식이 끝나고.. 술에 취한 아저씰 숙소까지 모셔다 드렸다.
후.. 술 좀 줄이시면 좋으련만..
건강도 안 좋으신데 저렇게 술로만 사시니.. 큰일이야..  

호텔로 돌아오는 길목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부딪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돌아서는데 그가 날 불러 세웠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 여기밖에 없어요. 잠깐 얘기 좀 해요. ]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
[저기.. ]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얘길 꺼냈다.
[저.. 정말 술 못 마시는 줄 몰랐어요.
그때 내가 일부러 취한 척 했다고 했던 거.. 사과 할께요. ]  
[됐어요. 전 그때 일 다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사님도 잊어버리세요. ]
그리곤 그를 지나치려는데 뒤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모습이 진짜죠? ]
무슨.. 말이지?
[모르겠어요. 나 유진씰 잘 모르겠어요.  처음 봤을 때의 그 맑은 느낌이 진짠지.. 아니면 호텔에서.. ]
또.. 그 얘긴가...
어제 그와의 황당하고 어이없었던 대화가 다시 떠올라 기분이 울컥 상했다.
[호텔에서.. 아직도 제가 이사님을.. 정말 그랬다고 믿는 건가요? ]
[그게... ]

[민형씨! ]
뜻밖의 채린이의 등장으로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난 채린이에게 인사만 남기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
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그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날 이상한 여자로 보든..
그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에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꼭 그렇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잖아..?
이 일만 끝나면 다시는 만날 일도 없을 사람인데..
그냥.. 이대로 놔두지 뭐.. 어차피 일 하는 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그런데.. 왜 이렇게 맘이 심난한지..
아무리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해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맘 한쪽이 묵직한 것으로 눌려 있는 듯.. 답답했다.
그동안 수많은 고객들과 일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이렇게 불편한 적은 없었다.
[일은 맘에 들어야 하지만.. 고객까진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던 내가..
고객과의 불편한 관계로 이렇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니.. 후...
참.. 우습다.. 정말..

오후에 잠시 방에 들렀다.
그런데 채린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
채린인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놓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 수첩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그 수첩이 어떻게 채린이에게 가 있지..?
[민형씨 호텔방에서 주은거야. 너.. 왜 그랬니? ]
아... 그럼 그 날 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떡하지..?
[저기.. 그건.. 그 날 내가 술이 많이 취했었어. 민형씬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거고..
내가 몸을 못가누니까 민형씨가 호텔방으로 데려간거야..
하지만.. 니가 오해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믿어줘 채린아.. ]
[알아. 민형씨도 아무 여자하고나 사고 칠 사람은 아니니까. ]
아무 여자...?
채린이의 가시돋힌 그 말이 심장에 쿡.. 박히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말이 심했구나. 내 말은 니 말을 믿는다는 거였어. ]
[아냐.. 그런 말 들어도 나 할말 없어.. 내가 실수 한 거니까.. 내가 술이 취해서.. ]
[준상이로.. 착각한 거구나?
난 이해해. 하지만 상혁이가 알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니? 상혁일 생각해.. ]
[정말 미안해.. 채린아.. ]

채린인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다신 날 보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채린이가 나가고.. 힘이 쭉 빠져 버린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내 말을 믿어주고 이해해줘서 다행이지만.. 내 실수가 채린이에게까지 상처를 줬으니..
후.... 정말.. 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날.. 홧김에 술만 먹지 않았다면.. 아무에게도 오해나 상처 따윈 만들지 않았을텐데...

장업장을 억지로 지키다가 결국 마무리는 언니에게 부탁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불을 켜고 코트를 벗으려다 누군가 방에 있다는 걸 알고 흠칫 놀랐다.
[채린이 서울로 갔어요.
유진씨가 원하는 대로 된 거 아닌가..? ]
이민형씨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
[그것보다 내가 왜 왔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아요? ]
[할 말 있으면 나가서 하죠.. ]
[나 좋아해요? ]
한걸음 옮기려다 그의 뜬금없는 좋아하냐는 말에 다시 돌아섰다.  
[뭐라구요? ]
[나 좋아하냐구요. 채린이한테 호텔에서 있었던 일 말했다면서요. ]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그건.. 일부러 말한 게 아니에요. ]
[그랬겠죠. 이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얘길 하는데 누가 일부러 했다고 믿겠어요? ]
울컥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일부러라니...
하지만.. 내가 얘기한게 사실이므로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제가 잘못 했어요. 미안해요.. ]
[사과 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유진씨한테 못박아 둘게 있어서에요.
나.. 여자 좋아해요. 하지만 유진씨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앞으로 헛수고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

그는 날 싸늘하게 스쳐지나 방을 나갔다.
난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가 나에게 던진 말들이 쿡쿡.. 심장을 찔러댔다.
아무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만 귓가에 어지럽게 흩어질 뿐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았다.
이젠 헛웃음이 난다.

난 이제 정말 친구의 남자를 유혹하려했던 여자로 낙인 찍혀버린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런 한심한 여자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단지 실수였다고 믿었던 그 일 하나로.. 이렇게 모든 게 엉망진창 되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걸 내 탓이라 돌려봐도..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제멋대로 평가되고 단정지어질 수도 있는 것인지..
왜.. 내 진실은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지..

처음 그가 날 오해했을 때.. 실망스런 마음에 나에 대해 충분히 변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늦게라도 오해를 풀었어야 했다..
풀리지 않은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부르고..
궁극엔 날 더이상 믿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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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님 글방펌












댓글 '3'

sunny지우

2003.05.27 02:50:32

소리샘님을 통해
겨울연가 다시 보고 읽기를 합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글 올려주시고 감사해요...
늘 평안함이 함께하기를....

운영자 현주

2003.05.27 17:39:01

매번 잘 읽고있습니다.. 전 글 잘쓰시는 분이 참 부럽더라구요..그리고 무엇보다 끈기와 노력,열정.. 매회 올라야하는 글에는 그만한 무게가 더 주어지는데..참 대단하십니다..그리고 늘 좋은 글 보여주시는 소리샘님도 너무 감사합니다....

코스

2003.05.28 00:04:56

유진에게 향한 민형의 오해 때문에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과 채린이가 넘 미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소리샘님 올려주시는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으면서 댓글을 빨리 달지 못해서 미안해요.^^
늘..행복하시고 정모때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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