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1] 녹차향

조회 수 3144 2003.05.28 09:44:20
소리샘
아침에.. 곧 공사가 시작될 건물에 가서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유진아. 큰일났어. 김 반장님한테 사고가 생겼어. ]
언니를 따라 달려가면서 대충 상황을 전해들었다.
간밤에 술을 많이 드시고 그대로 공사장에서 잠이 들어서 하마터면 동사 할 뻔했다고..
공사장에 도착하니 아저씬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야 겨우 정신이 드신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 ]
[흐흐... 미안혀... 미안혀... ]

아저씰 서둘러 숙소로 옮기고 나서야 한시름을 놓았다.
다시 잠이 든 아저씨의 얼굴을 보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부인의 기일..
매년 이 날이 되면 아저씬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술을 드셔왔다.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는데도.. 아저씨의 가슴앓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이구나..
아저씨의 손을 가만히 쥐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저씨.. 저도 알아요..
1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요..
아저씨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이러는 건 좋지 않아요.
하늘에 계신 부인께서 아저씰 보고 계신다면..
자신 때문에 이렇게 목숨까지 위험할 지경에 이른 걸 보셨다면.. 많이 가슴 아프셨을 꺼에요..
그러니까..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후... 쉬세요. 아저씨... ]

아저씨의 상태가 어느 정도 안심이 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사현장에서 인재사고가 얼마나 큰 사고인지.. 마르시안에서 알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텐데..
더구나 술로 인해 일어난 사고라면.. 더더욱 그냥 넘어가진 않을텐데.. 어떡하지..?

결국 내가 걱정했던 대로.. 오후에 언니에게서 마르시안에서 아저씰 해고할 꺼란 얘길 들었다.
그 얘길 듣자마자 그 사람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아저씨의 사고가 충분히 해고사유가 되므로 해고 결정을 번복하게 할 뾰족한 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 아저씨가 해고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이 한 겨울에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도 없을테고...
일마저 할 수 없다면 아저씬 정말 매일 매일을 술로만 살다가 그렇게 돌아가실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사무실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제.. 그런 일도 있는 뒤라서 그와 마주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
[김반장님을 해고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
[그래서요? 뭐가 잘못 됐습니까? ]
[그.. 해고..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실 수는 없나요? ]
[그럴 수 없습니다.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인재까지 생길 뻔한 일입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해고는 당연한 겁니다. ]
[한번만 다시 기회를 주세요..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사시는 분이에요.
이렇게 일을 그만두게 되면 정말 폐인이 될지도 몰라요. ]
[이건 사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 게 원칙이에요. ]
그의 전혀 흔들림 없는 단호한 거절에 난감했다.
마지막으로 매달려보는 심정으로 얘길 꺼냈다.
[술을 드신 건 잘못했지만.. 어제가 돌아가신 부인의 기일이었대요.. ]
하지만 되돌아온 건 그의 얼음장 같은 비난이었다.
[그거 다 변명 아닙니까? 술 마시고.. 눈물 흘리고.. 그게 죽은 사람을 위하는 겁니까?
내가 보기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행동으로밖엔 안 보여요. ]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
[아니요! 죽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잊어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힘껏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렇구나...
그런 사람이었어.. 여지껏 주위에 소중한 단 한 사람도 잃어보지 않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렇게 죽음을 쉽게 말 할 수는 없는 거야.

그가 지금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 말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말인지.. 그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럼 저도 그만 두겠습니다. 그 분을 고용한 건 우리니까.. 내가 책임지겠어요. 이제 됐죠? ]
[정유진씨. 너무 감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쨌든 전 이사님처럼 비인간적인 사람과는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
[뭐라구요? ]

[이제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죠?
아마 그럴꺼야..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말 할 수 있겠죠..
옆에서 숨쉬고 말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진 느낌.. 그게 뭔지 모르죠..
다른 건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단 한 사람만 없는 느낌..
그 느낌이 뭔지.. 당신 같은 사람이 알겠어요?
...... 그래서.. 가슴 아파하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

그의 팔을 뿌리치고 뛰어나오다시피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제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죠...?
......................

그에게 퍼부었던 말들..
그를 비난하는 말이었을까.. 아님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이었을까..
그래.. 변명이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난 준상일 못 잊고 아직도 가슴 아프다고.. 그게 잘못된 거냐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저씨에 대한 변명도 아닌..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닌.. 그저 내 변명이었을 뿐..

죽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잊어주는 거라던.. 그의 말..
어쩌면 그 사람 말이 옳은 건지도 몰라..
죽은 사람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죽은 사람에겐 더 가슴 아플지도..
준상아.. 너.. 정말 그러니..?
내가 널 잊지 못하고 있는 게.. 널 가슴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널 잊어주는 게.. 오히려 너한텐 좋은 일인걸까..?

언니가 피곤에 지쳐 잠든 지 한참 지난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밑에 쭈그려 앉은 채 전화길 들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여보세요..? ]  
[..엄마... 나야.. ]
[그래. 유진아. 근데 밤늦게 웬일이야..? 무슨 일 있니? ]
[아니..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
[훗.. 어린애처럼.. 잘 지내지? ]
목이 메어 말하기가 힘이 든다..
[응. ]
[감기 들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
[아냐. 감기 안 들었어.. 엄마... ]
[응? ]
[엄만.. 지금도 아빠 생각나? ]
[갑자기 아빠는 왜..? ]
[그냥.. 궁금해서.. 아직도 아빠 기억나? ]
[그럼.. 기억나지.. 아빠가 뭘 좋아하셨는지.. 뭘 싫어하셨는지..
너희들이 이쁜 짓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하나도 안 잊어먹고 다 기억하고 있지..? ]
[1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렇게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해.. ]  
[훗.. 아무리 세월이 흘러봐라.. 잊혀지나..
가슴에 묻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하는 거야.. ]
[ ........... ]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인사를 남기고 수화길 내려놓았다.

가슴이 옥죄어 오는 듯 통증이 느껴진다.
숨죽여 울음을 토해냈다.

그렇지..? 엄마.. 내가 틀린 게 아니지..?
내가.. 여지껏 준상일 기억하는 거.. 당연한 거지..?
앞으로도 계속 준상일 못 잊어도.. 그거.. 잘못하는 거 아니지..?
나도.. 준상일 가슴에 묻었는 걸...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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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님 글방펌


겨울연가OST중에서"시작"






댓글 '2'

지우팬

2003.05.28 23:54:45

녹차향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겨울연가가 지우님보단 배용준님쪽에 포커스가 더 맞춰질때마다 조금 속상했었습니다. 지우님이 열연하신 유진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는 글을 보니 그래서 더욱 반갑게 느껴집니다. 전해주시는 소리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지우팬으로서 너무 좋네요.. 잘 읽겠습니다.

★벼리★

2003.05.28 23:55:54

눈물이..피잉하고 도네요..준상일 잊지 못하던 유진이의 마음이..너무나도 잘 전해져요.. 눈물머금은 눈으로 또박또박 따지던 유진이가 생각나요.. 소리샘님..글 감사합니다....^^ 준상이를 잊지 못하는 유진이.. 가슴 아픈 첫사랑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주게 됩니다.. 누구나 그런 사랑 한번쯤 해본다면.. 좋은 추억이겠죠.. 그런 추억하나 없는 전,,쩝.. 후딱 만들께요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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