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4] 녹차향

조회 수 3129 2003.06.02 09:08:59
소리샘
하루 이틀 더 입원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을 고집했다.
특별히 다친 곳도 없는데 병실에 누워있는 것도 답답하고..
또 나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도 맘에 걸렸다.
언니에게 아침에 퇴원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퇴원할 때 온다는 걸 말렸다.

짐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언니에게 바로 현장으로 간다고 전화를 걸고..
다이어리를 덮으려는데 상혁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후.... 착찹한 마음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짐을 다 챙기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혼자서 퇴원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쓸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한 군데 기댈 데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외롭기도 했다.
그냥.. 언니더러 오라고 할 껄 그랬나...? 휴...

무심코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꽃다발에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이민형씨...?
[퇴원 축하해요. ]
엉겁결에 꽃을 받아들었다.
[퇴원.. 축하선물이에요.. 가죠. ]
그리곤 내 손에 있던 가방을 얼른 빼앗아 들고 앞장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걷는데.. 슬몃 미소가 지어졌다.
저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쑥스러워하는.. 어찌보면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모습.. 처음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너무 다르게 행동하는 그가 어색했다.
그저 대신 다쳤다는 것으로 설명하기엔.. 그는 너무 친절했고 조심스러웠다.
나 또한.. 그 것 때문에 이런 친절을 받는다는 게 미안했다.
사실.. 난 그를 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순간적으로 그때의 그는 내 눈엔 준상이로 보였던 게 사실이니까...

차안에서 그는 괜시리 말이 많았다.
[나.. 꽃 들고 누구 기다린 거.. 처음이에요.
선배는 나더러 플레이보이, 플레이보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난 그건 아닌가봐요. ]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마음인 걸 알기에 그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아니.. 제가 유진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

벤치에 앉아서.. 난 그가 얘길 꺼내길 기다렸다.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 미안합니다. ]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미안하다니..? 사고.. 얘긴가..?
[그동안 유진씨에게 무례하게 군거.. 진심으로 사과할께요.
사과가 늦었어요.. 이말 하려고 서울에서 일찍 내려온 건데..
그 날 유진씨 사고나는 바람에 말을 못했어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동안 저한테 일부러 그랬단 말인가요? ]
[변명 같지만.. 제가 유진씰 많이 오해했었어요.. 미안해요. ]
[오해는.. 풀렸나요?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
맘이 한결 가벼워지는걸 느꼈다.
그가 여태까지 나에게 보인 모습들이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니..
그리고.. 이제 그 오해가 풀렸다니..
[무슨 오핸지.. 안 물어봐요? ]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나랑 닮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그의 말에 놀라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준상이를 알게 된건가..?
[그래서.. 유진씨가 내 관심을 끌려고 지어낸 얘긴 줄 알았어요. ]
[제가.. 왜 민형씨를.. ]
[그러게요..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본 유진씨 모습이랑 연결이 안되니까.. 나도 괴로웠어요. ]
그리곤 그는 물기 어린 눈으로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유진씨.. 날 처음 봤을 때 눈물 흘렸던 거.. 그 사람 생각나서 그랬던거죠..?
그만 두겠다고 했던 것도.. 나 대신 다친 것도.. 다.. 그 사람 때문인거죠..? ]
날 가슴아프게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며.. 촉촉이 젖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군 내 눈과 가슴도.. 어느덧 따뜻하게 젖어왔다.
[강준상이란 친구.. 나랑 그렇게 많이 닮았어요? ]
많이.. 닮았냐구요...? 얼마나.. 많이 닮았냐구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의 일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가 준상이가 아니란 것.. 그 것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네.. 착각하고 싶을 만큼요..
준상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던 적.. 그렇게 믿고 싶었던 적 많았어요.
죽은 사람.. 잊어주는게 그 사람한테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그랬었죠..?
그 말 맞다는 거 아는데.. 그런데.. 난 그게 잘 안돼요. ]

[나.. 용서해 줄 수 있어요..? ]
심각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 슬몃 미소가 지어졌다.
[오해는..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리고 내 마음도..
서로를 바라보며.. 우린 처음으로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와 단둘이 걷는 이 길이.. 이렇게 편안할 수도 있다니..

[궁금하네요.. 나랑 똑같이 생긴 유진씨 첫사랑.. 어떤 사람이었어요?
물론.. 겉모습말고는.. 나하곤 다르겠죠? ]
준상이의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렸다.
[ ... 많이요.. ]
그와 함께 있을 땐.. 준상이의 어두운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 모습이.. 민형씨와 준상이가 가장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일까..
[약혼자 앞에선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
무슨 말인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보면.. 이 여자가 준상이란 사람 생각하는구나..
이젠 나도 금방 알 수 있다구요. ]
가슴 한켠이 싸해진다.
그런.. 가요..? 당신이 알 정도면.. 그럼 상혁인..
그렇군요.. 상혁이도 알겠군요.. 내가 준상일 생각하는 건지.. 아닌지..
그동안 그 것을 알고도.. 모른체 묵묵히 참고 견뎠을 상혁인데...  
이제까지 내가 상혁일 참.. 가슴 아프게 했었네요.. 내가.. 나빴네요...

그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다시 새롭게 시작해요.
이번엔 착각하지 마요..? 나 이민형이에요. ]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그의 손위로.. 준상이의 손이 겹쳐보였다.
준상인 알았을까..?
자신이 내민 손을 잡았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손에서 시선을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껏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난 그의 얼굴에서 준상일 지우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민형..
그는 이민형 일 뿐이다.. 이민형...
이젠.. 착각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정유진이에요. ]


사람 사이의 오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한 사람을.. 오해로 빚어진 모습만으로 판단하고 단정해버리게 하지 않았던가.
그는 나를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 몹쓸 여자로 보았었고..
또 난.. 그를 자신의 겪은 한가지 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편협하고.. 냉정한 이기주의자로 보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그동안 서로에게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이제라도 그를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여지껏 날 못 견디게 만들었던 건.. 그가 준상이가 절대 아니라는 것.. 꼭 그것은 아니었다.
그가 준상이가 아니라는 건..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이제까지 내가 보았던 그의 모습들이 날 힘들게 했던 것이다.
준상이와 너무 똑같은 그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들이..
준상인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준상이라면 절대 저렇지 않을텐데..
매 순간 그를 준상이와 비교했고.. 또 실망해야 했다.
어쩌면 난.. 그가 준상이는 아니지만.. 준상이 같은 사람이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넘어가거나 아니면 사실을 전하려고 애썼을 일들을..
그래서.. 그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내 바램과는 너무 다른 그에게 받은 실망과 상처가 커서.. 다른 방법을 찾을 여력조차 갖지 못했는지도..

이젠.. 그를 보는 게 힘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젠 그에게 덮여있는 준상이의 그늘을 걷고.. 그를 그로.. 바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댓글 '3'

온유

2003.06.02 18:56:34

소리샘님 매회 겨울연가를 기다렸던
그 설레임 그대로 소리샘님이 올려 주신 글을 읽으며 또 다른 한편,한편의 겨울연가를 되새김질
해봅니다.잘 읽을께요~~~~감사합니다.

달맞이꽃

2003.06.02 19:14:21

소리샘님 ~
뵐날도 몇일 안남았네요 ..겨울연가 소리샘님을 만난다고 하니 유진이나 준상이를 만나는것처럼 설레네요 ..후후후~~잘읽고 있담니다 .감사해요~~~^*

코스

2003.06.03 00:05:38

소리샘님...덕분에 유진의 추억밝기를 하는 코스랍니다.
글 속에서 그때의 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서요.
매일 올려주시는 성의에 너무 감사 드려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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