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구호는 헛소리와 같다.
북의 경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관념의 유희만을 일삼는 자들아.
너희들도 정신 차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내가 걸었던 길을 걷게 되리라

86년 송두율 등에 의해 입북한 오길남 박사의 증언  
  
송두율 교수의 독일 내 행적에 대해 오길남 박사는 “자신만큼 송씨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없다”고 단언한다.

오길남 박사는 1970년 독일 튀빙겐 대학으로 유학해 재독 反韓단체 ‘민주사회건설협의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80년 독일에 정치망명을 선택했고 그 후 1985년 12월 송두율, 윤이상, 김종한 등의 권유로 북한에 넘어갔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오 박사는 두 딸과 아내를 데리고 북한에 넘어가 ‘한민전’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11월 ‘재독유학생포섭 대동입북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하던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오 박사는 독일에 다시 정치망명을 해 생활하다 1992년 5월 귀국해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오박사는 북한에 들어온 후 그 곳의 현실을 깨닫고 탈출을 고민하게 되는데 이때 오박사의 부인은 고민하던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가세요! 다시는 젊은이들이 대남공작의 제물이 되지 않게하세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이곳에서 빼내주세요. 그렇게 안 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 속에 있겠어요...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 와 치욕스런 공작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도망치세요. 우리야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자기들의 체제가 병약하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 그러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거예요. 준이 엄마(송두율의 처)도 민중이 엄마(오박사를 입북시킨 김종한의 처)도 앙큼한 여자들이에요. 나도 앙큼해져야겠어요...다시 한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나가세요”

오 박사는 부인의 말대로 86년 자유독일로 그리고 92년 자유대한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그는 부인과 두 딸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90년대 이후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민들은 수년 전 부인과 혜원, 규원 두 딸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전할 뿐이다. 92년 11월29일자 서울신문에는 당시 귀순한 안혁, 강철환씨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며 오 박사 가족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

“..그들은 지난 4월 독일 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경제학 박사 오길남씨의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이었다...신 아주머니는 수용소의 첫날밤부터 목 놓아 울었다. ‘어린 딸들과 이곳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게 되다니...’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온종일 작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사람들은 신아주머니의 구슬픈 하소연과 울음소리에 신경 쓸 처지가 못 됐다...

이튿날 새벽녘 간밤의 울음소리와 다른 여자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에 놀라 눈을 떴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에 신아주머니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그러나 이날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그녀는 몇 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신아주머니가 수용소에 들어온 지 석 달째쯤이었다. 새벽녘에 ‘불이야’하는 소리에 깨어났다...판자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차 있었고 신아주머니가 두 딸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머리카락과 얼굴, 손발이 불에 그을려 실신해 있었다.

신 아주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발버둥치면서 울부짖었다. ‘죽는 것이 행복한데 왜 말리느냐!’그날 이후 신아주머니는 실성한 듯 웃으며 말하고는 했다.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니 할 수 없이 살아가야지...’”


<윤이상 “통일운동 방해하면 가족 죽을 것”>

오 박사는 북한을 탈출해 독일로 돌아온 이후 가족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송씨 등의 화답은 냉담했다.

오히려 윤이상은 십 여 차례에 걸쳐 오 박사가 다시 북한에 돌아갈 것을 회유했다. 입국당시 입었던 너덜해진 옷을 그대로 입은 채“북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오 박사 가족의 편지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윤이상은 또 북한에 동조하지 않는 오 박사를 힐난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소. 왜 사람들을 집적거리고 다니며 北을 욕하는 거요. 가족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겠소? 통일운동에 나서라고 하지 않았소? 왜 좋은 글을 써서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내지 않소?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통일운동을 자꾸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


<송두율, 죄 값 받아야>

오 박사는 자신의 책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를 통해 ‘송두율, 윤이상, 황석영 등은 대남공작기구의 신임과 신뢰를 받아 김일성의 접견을 받았던 자들로서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현혹돼 놀아난 허수아비’라고 적고 있다.

또한 오 박사는 북한의 현실을 모른 채 북한이 선동에 놀아난 지식인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동백림사건의 주역 정하룡의 동생 정현룡은 경기고와 서울대학교를 나왔지만 장석규라는 가명을 쓰며 고작 칠보산연락소에서 대남방송요원을 하고 있다. 부산대에서 철학교수를 했던 윤노빈도 정영호라는 가명으로 대남방송요원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예는 수없이 많다... 황석영은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네’라고 했지. 하지만 그가 어찌 그런 걸 알랴. 그러지 않다면 눈에 백태가 끼었거나 일부러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송두율이 언젠가 스스로를 뉘우치고 죄 값을 받겠다고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송두율도 이제는 깨달았을 것이다. 북에서는 학문연구활동이 불가능하여 대학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므로 그는 살기 위해 북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이념의 구호는 헛리와 같다. 북의 경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관념의 유희만을 일삼는 자들아. 너희들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내가 걸었던 길을 걷게 되리라”


김성욱기자  2003-10-06 오후 12:34:00

http://www.futurekorea.co.kr/article/article_frame.asp?go=content§ion= 정치사회&id=442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440 또다시 추가된 사진입니다............^^ (강추~) [11] 운영자 현주 2003-10-10 3095
15439 천국의 계단을 기다리며. [2] 1%의 지우 2003-10-10 3051
15438 꿈속에 당신이오시면.. [2] 평범한사람 2003-10-10 3112
15437 하루밖에 살수없다면.. [2] 평범한사람 2003-10-10 3060
15436 아날 명장면 모음 [2] 지우만을! 2003-10-10 3316
15435 달맞이꽃 언니 보세요~~ [4] 앨피네~★ 2003-10-10 3048
15434 Blue - One Love [1] 앨피네~★ 2003-10-10 3050
15433 사랑이란... [2] 앨피네~★ 2003-10-10 3046
15432 짧은 만남... 긴 감동...^^ [3] 꿈꾸는요셉 2003-10-10 3072
» 사이비 경계인 송두율에 관한 오길남박사의 증언-생각해 봅시다. 체 게바라 2003-10-10 3105
15430 jude님이 주신 지우님 사진입니다. [5] 코스 2003-10-10 3166
15429 [re] 한장더 추가........^^ [2] 스타지우 2003-10-10 3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