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이 없는 곳에서 유진이의 10년 [14]

조회 수 3021 2003.07.15 20:22:14
소리샘
준상이가 없는 곳에서.. (14)


작성일: 2002/07/29 04:39
작성자: 녹차향(ippnii76)


12월 31일..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차라리 아파서 눈을 뜨지 못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밖은 어두컴컴하다.
부엌에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숨막히던 고요를 깬다.
아침을 열어주던.. 듣고 있으면 포근하고 안심이 되던 엄마의 그 소리들 조차..
한없이 가라앉는 내 마음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한다.

그 날.. 그 날 아침은 어땠었지..?
그날 아침에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었나..?
그래.. 맞아.. 그 날 아침은 정말.. 날아갈 것 같았어..
아침마다 되풀이되던 이불속에 몇분이라도 더 있겠다는 실랑이도 없이
눈을 뜨자마자 이불을 걷어차고 나왔었어..
그리곤.. 부엌에 들어가 쌀 씻는 엄마를 뒤에서 끌어안았지..
잠꾸러기가 웬일이냐고 엄마는 웃으며 날 놀렸었어..
혹시 남자친구라도 만나러 가냐고..
훗.. 그때 난.. 얼굴이 빨개졌었어.. 너무 속 보이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리곤 막 잠을 깨고 나온 희진이에게 장난을 쳤지.
그 날은.. 하루종일 맘이 들떠서 잠시도 한자리에 앉아있질 못했었어..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고..
준상이가 나한테 해줄말이 뭘까..?
분명.. 나한테 고백하려는 걸꺼야.. 그럼.. 나도.. 고백해버릴까..?
아니야..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선 안돼.. 한번 쯤.. 튕겨볼까..?
준상이가 나에게 할 말들을 상상하며.. 그때 대답할 말들도 준비하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었지..
그랬는데...

그 날의 하루 일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이윽고..
준상일 기다리던 그 날 밤이 떠오르면서.. 내 가슴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준상이..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 12시가 되면서 들리던 제야의 종소리..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그 사이로 들리던 준상이의 목소리.. 유진아...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내린다.
유진아... 유진아....
준상이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귓속을 울린다.
숨이 턱.. 막힌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무릎을 끌어당겨 가슴을 꾸욱 눌러 안았다.
준상이의 목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에.. 준상이는.. 죽었어...
날 만나러 오다가.. 나 때문에...
앙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언니...! 일어.. 나... ]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희진이가 멈칫한다.
후다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언니 울어.. ]
[응..? 언니가 울어? ]
엄마가 내 옆에 앉아 어쩔줄 몰라하신다.
[유진아.. 왜 그래.. 응..?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니..? ]
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은채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울어.. ]
엄만 더이상 묻지 않고.. 아무말도 없이 계속 우는 날 가만히 토닥이신다.
[희진아.. 여기있지 말고 잠깐 tv보고 있어.. 응? 착하지..?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그 애.. 생각나서 우는 거니..? 후... 벌써.. 1년이 지났구나..
그래서.. 우리 유진이.. 또 가슴이 많이 아픈거구나.... ]
참으려고 애쓰던 울음이 왈칵 쏟아진다.
엄마에게 안겨 엉엉 울고 만다.
[그래.. 1년 지났다고.. 어떻게 잊혀지겠니...
그동안 참느라고.. 우리 유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진아.. 실컷 울어.. 후련해질 때까지.. 응..? ]
한참 그렇게 소리내서 울고 나니.. 조금은 가슴이 후련해진다.
엄마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침대에 누웠다.
[엄마.. 조금 있다 나갈께.. 미안해.. ]
[그래.. 엄마가 밥 차려놓고 나갈께.. 꼭 밥 먹어.. 알았지..? ]
고개를 끄덕였다.
엄만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신다.
[에그... 저 어린 것이 그런 일을 겪었으니.. 쯧쯧.. ]
문이 닫히면서.. 한숨이 섞인 엄마의 혼잣말이 들린다.

이런 모습을 엄마에게 보인것이 미안해진다.
엄만.. 나보다 더 힘들었을텐데..
아빠를 먼저 보내고.. 정말.. 많이 울고 싶으셨을텐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엄마가.. 안쓰러워진다.
그런데.. 딸이.. 누군가의 죽음때문에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시고..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후... 정말.. 이런 모습..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참 후에.. 방에서 나왔다.
엄마는 벌써 시장에 나가시고 희진이 혼자 거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희진아.. 뭐해? ]
[언니야.. 인제 괜찮아? ]
[ ..응.... ]
[언니야.. 이거 봐라? 얘네들.. 지금 밥 먹고 있어.. ]
희진이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종이 상자 안에서 병아리들이 모이를 쪼아먹고 있다.
얼마전에 학교앞에서 샀다며 병아리 두마리를 안고 들어왔었다.
몇번이나 금방 죽어버려서 이제 사오지 말라고 해도 희진인 말을 듣지 않는다.
죽은 병아리들을 뜰에 묻고 나선 다신 안사올꺼라며 무덤앞에서 며칠을 훌쩍이다가도..
며칠뒤엔 눈을 반짝이며 또 병아리들을 안고 들어왔다.
이번엔.. 이번엔..
매번 병아리들을 묻으면서도.. 이번엔.. 이번엔...
[이번엔.. 안 죽을꺼야.. 꼭 커다란 닭이 될때까지 키울꺼다? ]
희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번엔.. 건강하게 잘 살꺼야.. ]
또 금방 죽어버릴껄.. 처음부터 병들어있는 병아리를 사온건데..
누가 어린애들한테 이런 병든 병아리를 파는 걸까..
이번에도 병아리가 죽어버리면.. 다른 걸 사줘야겠다..
강아지를 사줄까..? 아주 건강한 걸로.. 죽지 않을 걸로..
열심히 병아리들을 돌보는 희진일 두고 부엌에 갔다.
깔끔하게 차려져있는 반찬들..
밥을 푸고 국을 데워서 식탁앞에 앉았다.
몇숟갈 입에 넣다가 이내 일어섰다.
목이 메어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대충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병아리곁엔 희진이가 없다. 어디 갔지..?
희진이가 안방에서 후다닥 뛰어나온다.
[언니.. 나 친구 집에서 놀다올께..]
[희진아.. 오늘은 나가지 말고 언니랑 있자.. ]
[안돼.. 약속있단 말야.. 글구 언니는 몇살인데 아직도 혼자 집을 못보냐? ]
[뭐어..? 이게.. 알았어.. 근데 누구네 집에 가는거야? ]
[어.. 준혁이네. 나 갔다 올께. ]
준혁이..? 아.. 그 애..
재호라나.. 준혁이라나.. 후후..
쪼끄만게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된다며 가끔 상담을 청해온다.
아직 애기인줄 알았는데.. 벌써 남자친구도 사귀고.. 후후..
희진이가 벌써 그렇게 자랐나..?

조용한 집이 병아리들 삐약이는 소리에 한결 생기가 돈다.
상자안에 물이랑 모이를 조금 넣어주고 방에 들어왔다.
다시 주위가 고요해진다..
난..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분명히 약속이 있는데.. 누구와 했는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다.
옷을 꺼내입었다가 다시 벗어놓기를 반복하고 있다.
자꾸 시간은 흘러가는데.. 난 몇시간째 그러고 있다.
옷을 꺼내입었다가는.. 아.. 그래.. 오늘 아무하고도 약속하지 않았지.. 하는 생각에 옷을 벗어놓고..
그러다 보면.. 다시 약속시간에 늦은 것 처럼 맘이 바빠진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서야.. 난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나오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런데.. 내가 어딜 가려고 나왔지..?
만날 사람도 없는데.. 내가 왜 나왔을까..
자꾸 시내쪽으로 맘이 쏠린다.
난 애써 외면하고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 가선 안돼..
가봤자.. 아무도 오지 않아.. 준상인.. 정말.. 오지 않아..
너.. 그 자리에 가서.. 준상일 기다리고 싶은거니..?
혹시.. 준상이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거야?
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젠 그런 기대 같은거.. 하지 않아..
혹시.. 하는 그런 맘.. 이젠 없어..
그 자리에 가봤자.. 가슴만 더 아플꺼라는거.. 잘 알아..
준상인.. 죽었으니까..
날 만나러.. 다신 오지 못한다는거.. 잘 알아.. 잘.. 아는데.. 그런데..
왜 자꾸.. 그 자리에 가고 싶은걸까..
이상해.. 자꾸..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애..
준상이의 영혼이.. 날 기다리고 있는걸까..?
그래서.. 내 맘이.. 자꾸 그 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 준상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애..
그때.. 날 오래 기다리게 한것이 미안해서.. 나보다 먼저 와 있을 것 같애..
참.. 바보같지..?
그럴 리 없다는 거.. 잘 알면서.. 후...

결국.. 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시내는 여전히 북적인다.
1년전 그 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길가 간판하나까지도.. 1년전과 똑같다.
구세군 종소리까지도..
후... 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점점.. 그 자리가 가까워지면서.. 심장의 두근거림은 더 빨라진다.
차마 그 자리 가로등을 쳐다보지 못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제 고개를 들면.. 가로등이 바로 앞에 있을 것이다..
난..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서 버렸다.
아무도 서있지 않은 빈 가로등 밑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 잘 했어..
여기까지 온게.. 잘못 된거야.. 오지 말았어야 했어..
몇걸음 걷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고 말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후... 바보같이.. 왜 돌아본거야..
그리고.. 너 왜 눈물이 나는거니..?
너.. 알고 있었잖아.. 아무도 없을꺼라는거.. 알고 있었으면서.. 왜 우는거야..?
너.. 정말 바보같애.. 바보같다구..
그만 쳐다봐.. 제발.. 어서 집에 돌아가자.. 뭘 더 기다리는 거야..

눈물을 닦고.. 돌아섰다.
다신.. 오지 않을꺼야.. 다시는...

************************************

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글펌









댓글 '2'

코스

2003.07.15 23:29:19

소리샘님...오늘도 잊지 않고 올려주셨네요.
시간이 지나고 다른 드라마들을 보면서
겨울연가의 참 맛을 새삼 다시 느껴보는 요즘이랍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행복을 준 아름다운
두 주인공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많은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읽고갈께요.
소리샘님...좋은글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소리샘

2003.07.16 00:50:40

겨울연가를 보고 또 보고 곱씹어 보면서 참 명작이란
생각이 들어요 연기자들 연기도 정말 뛰어나고요
정말 연기를 너무 잘했지요 조연들까지도
요즘 여름향기를 보면서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유진이의 맑고 청순한 연기 누가 했어도 감히
흉내를 못냈을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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