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

조회 수 3011 2002.04.09 23:04:27
토미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던 밤, 당신은 허허벌판에 승용차를 운전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니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언제 올 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당신이 절대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곧 목숨을 잃을 것 같은 환자, 언제가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의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신 차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세 사람中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답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의사 선생님에게 차 열쇠를 주어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폭풍우 속이라도 이상형과 함께라면 견뎌낼 수 있겠지요."

  가끔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현재 서 있는 나의 자리까지도 비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올 때...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는지 생각을 해 보게 합니다.

  전에 소개한 책冊중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이 작가의 소설中에 <암리타>라는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이 두꺼운 책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나의 신작新作이 아닌 94년작年作 장편소설이며, 이미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단에서 굴러 기억을 잃어버린 나(사쿠미)와 자살한 여동생(마유), 여동생의 애인이었고 지금은 나의 애인인 그(류이치로), 초능력을 가진 남동생(요시오), 그밖에도 이상한 친구들이 잔뜩 나오는 이 소설은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단원의 이름이 '멜랑콜리아'고, 본론에 해당하는 단원은 '암리타'입니다.

  실제로 이 책의 차례를 설명하는 페이지를 보면,

     멜랑콜리아
     암리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역자 후기

  가 전부입니다.

  <멜랑콜리아>로 이미 읽은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설명할만한 줄거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초능력에, 사고에, 가출이 줄줄이 이어지니 사건은 충분합니다.

  다만 그보다도 이야기 속이 아니라 이야기 바깥에 의미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은 지루하다... 싶기도 한 '나'의 독백이 책을 읽는 '나'의 마음과 겹쳐지는 그 지점을 바나나는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갑니다. '사쿠미'의 경험과 감정을 읽는 어느 순간, 그 진동이 고스란히 내게로 옮아와 공명하는, 그런 멍한 공감을 신비주의자 바나나가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속에서는 자주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정지한 아주 얇은 시간 속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영원함이 들어있다... 고 바나나는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 역시 모든 시간에 골고루 편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아득하고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자각이라는 것... 그 순간에 '나'는 행복할 뿐 아니라 내 영혼이 우주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것... 지금 단단한 '나'의 손과 발은 언젠가 형체 없이 사라져 세상 속에 기체처럼 섞여 들리라는 불가사의한 행복... 그래서 더욱 '나'의 손과 발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암리타'도 그런 의미입니다. 암리타란 '신이 마시는 물', 감로수를 말한다고 합니다. 소설에서 '류이치로'는 "살아간다는 것은 물을 꿀꺽꿀꺽 마시는 것 같은 거"라고 말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암리타>는 확실히 너무 길어 긴장이 떨어지고, 전반의 오컬티즘occultism도 생뚱한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멈추어 삶의 심연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들여다보게 하는 바나나의 솜씨만큼은 매력적입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북받치는 떨림들, '어딘가 적어놓았다면 좋았을 걸' 후회하게 되는 그것들을 모아둔 일기 같은 것이 바나나의 소설이라는 사실만으로 읽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冊속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지금 여기에 있으며, 지금에만 존재하는 육체로 온 사방에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느낀다는 것이.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속도는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절정에서 감상은 금방 메말라 눈 깜작할 사이에 아득한 순간의 연속으로 흩어진다. 그리하여 이 눈물도, 금세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리리라...

  '이해인글모음'中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방바닥에 내려앉은 햇살을
     아기는 손으로 집어 듭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햇살 잡다가
     아기는 그만 울음이 터집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햇살은
     슬그머니 문틈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집에 오는 길에 본 유모차에서 자고 있는 아이 생각이 나서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세상의 글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더군요. 아마 옆에 있는 엄마를 믿기 때문이겠죠.

  이상하게 밤이 춥습니다.
  계절은 봄이라고 하는데...
  그럼... 쉬세요.

     사랑하는 이가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운하게 할 때는 말을 접어 두고 하늘의 별을 보라.
     별들도 가끔은 서로 어긋나겠지.
     서운하다고 즉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별들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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