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9] 녹차향님

조회 수 3011 2003.05.24 10:09:20
소리샘


기어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느라 몸이 찌뿌둥했다.
술은 이미 어제 밤 호텔을 나오면서 깼지만.. 아직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일어서자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서랍을 뒤져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다시 누웠다.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침에 마르시안에서 있을 회의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마르시안에 가면 그를 만날 것은 당연하고.. 후...
한숨밖엔 나오는 것이 없다.
모르겠다.. 그냥.. 잠이라도 좀 자두자.. 이따 있을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난 눈을 꼭 감았다.

[유진아! 유진아. 안 일어나? ]
진숙이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응..? 몇 시야? ]
[8시 다 되가. 어제 늦게 들어오는 거 같더니.. 안 늦었어? ]
[뭐? 8시? ]

정신없이 준비를 하고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잘하면.. 9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숨을 돌리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사람 얼굴을 봐야하나...
혼란스런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동안 어느 새 택시는 마르시안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다닥 뛰어 회의실 문을 열었다.
이제 막 회의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꾸벅 인사를 하고 정아 언니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가 날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애써 시선을 피했다.

회의가 끝나고 그가 나에게 잠시 얘길하자며 불러 세웠다.
그를 마주보는게 힘들지만.. 어쨌든 어제 일에 대해 해명을 해야겠기에 그 사람 앞에 섰다.
[어제 일... ]
그의 말을 자르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시선은 여전히 그를 피하고 있었다.
[어젠.. 제가 실수가 많았습니다. 술에 취해서 이사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요. ]
[확실한 겁니까? ]
확실한 거냐니.. 의외의 말에 난 고개를 들었다.
[착각한 게 맞냐구요. ]
[무슨 뜻이죠? ]
[어제.. 유진씨 만취한 사람치고는 너무 진지했어요. 그리고...
취할만큼 많이 마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럼.. 제가 일부러 취한척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
[그건 유진씨가 더 잘 알겠죠. ]
[그럼 그 말.. 제가 정말 이사님을.. 유혹하려고 했단 말인가요? ]
기가 막혔다.
어제의 내 행동이.. 그렇게 깊이 오해를 살 정도였단 말인가..
내가.. 그런 여자로밖엔 안 보였단 말인가.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전 약혼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채린이 친군데.. 어떻게 그런.. ]
[그러게요. 저도 왜 그랬는지 궁금하군요.. ]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술에 취해 착각했다는 얘기를 아예 거짓으로 단정지어 버린 그에게 더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제가 실수가 많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꺼에요.
앞으로 일 외엔 부딪치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
  
처음에 치밀어 올랐던 화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실망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가.. 믿어 줄 꺼라 생각했던 걸까..
어제 밤의 그의 행동은.. 그저 순간적인 오해에서 나왔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 행동을 이해해 줄꺼란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믿어는 줄 줄 알았다.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러냐고.. 그랬었냐고.. 알겠다고.. 그냥 그 정도만이라도..
그런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불쾌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동안 그가 날 그런 여자로 볼만한 그런 행동을 했었던가...
내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헛..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난.. 그 사람을 좋게 생각했었는데..  
그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제대로 알려는 마음도 없는..
그저 자신의 짐작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단정지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어..
내가 저런 사람을 준상이로 착각했었다니..
그 사람에게서 순간순간 준상이를 찾으며.. 그를 준상이라 믿고 싶어했다니..
오히려 잘 된건지도 몰라.
부정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향하던 나의 관심..
이쯤에서 접을 수 있게 된 것.. 그래.. 잘 된거야.
난.. 그냥 맡은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스키장 일이 끝나면 더 만날 일도 없으니..

결국.. 이 모든 건.. 내가 아직도 준상일 잊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야..
그동안.. 준상일 잊으려고만 해서 그랬던 건지도 몰라..
기억하면.. 너무 괴로우니까.. 자꾸 맘속에 꽁꽁 잠궈 두려고만 했어..
준상이 죽은 뒤로.. 누구에게도 단 한번.. 맘 편히 준상이 얘길 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였을까.. 너무 잊으려고만 해서 더 잊혀지지가 않았던 걸까..
풀어내려 하지 못하고 꽁꽁 쌓아두려고만 했기 때문에.. 그것이 응어리가 되어..
내 맘속에 준상이의 자리가 더 커졌던 건지도 몰라.
10년의 시간... 그동안 난 뭘 했던 걸까..
준상이에게서 어느 것 하나.. 벗어나지도 못하고..
내가 준상일 그저 지난 추억으로 생각할 만큼 벗어나 있었다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아는 누구와 너무 닮았네요..
그렇게 지나가는 말처럼 편하게 털어놨을 수도 있었겠지..
그랬다면.. 이런 어이없는 오해를 만들 일도 없었을테지..  

후...
잊어야지.. 이젠.. 잊을 때도 됐어..
가끔.. 준상이가 생각나면 얘기도 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하고..
그러면서.. 잊어가야지..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다 보면.. 언젠간 준상이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날이 오겠지..
아프지 않고도.. 준상일 떠올릴 수 있을 때가.. 그럴 때가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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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연가사람들  녹차향글방 펌








댓글 '2'

몽마르뜨언덕

2003.05.26 08:43:03

10회기다리는데 오늘은 올려주시겠죠 참 재밌게 보고있는데 이 글쓰신분 작가로 데뷔해도 손색없을듯.

영아

2003.05.26 09:56:43

오늘도 소리샘님이올려주신 유진의연가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녹차향님과 소리샘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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