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中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작가뿐만이 아닙니다. 지름길을 찾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겨운 반복! 피나는 반복! 그것만이 그 무언가가 되는 길입니다.
전에 읽은 책冊중에 남영신이 지은 <말 잘하려면 국어부터 잘하고 외국말 잘하려면 한국말부터 잘해라>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저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건 제대로 쓰는 것입니다.
"야! 제 롱다리 정말 끝내주지 않니?"
"우와! 정말 울트라캡송 나이스짱이다. 그런데 난 이게 뭐야. 아! 열 받아."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한 토막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에 비해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훨씬 더 많아서인지 대체로 말을 참 잘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용어에 의문을 가진 뒤 아예 한글학자로 변신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6년 동안 배운 영어로는 외국인과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12년 동안 배운 국어는 제대로 쓰고 있는지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외국어의 탄탄한 기초가 되어야 할 우리말은 거꾸로 외국어에 의해서 오염되거나 정체성까지 파괴되어 왔다고 합니다. 한자시대에는 수많은 토박이말들이 한자로 바뀌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유식함의 표식인 양 마구 혼용되어 왔다고 말입니다.
예컨대 원래 '삼개'인 마포는 삼을 가리키는 한자어 마(麻)와 개를 가리키는 포(浦)를 붙여 만들었고, 서대문구 아현동의 이름인 아현(阿峴)은 원래 '작은 고개'라는 뜻의 '애오개'였는데 아현(兒峴)으로 쓰다가 요즘은 아현(阿峴)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공장의 창고에서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물건을 나르는 것을 대신한 '지게차'라는 용어는 점점 외래어 이름인 '포크리프트'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말글살이는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간 사람들이 각기 자기가 공부했던 곳에서 보고 배운 것을 우리나라에 옮겨 심는 것이 자신의 임무인 양 착각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크게 변질되어왔다고 저자는 또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학을 다녀 온 전문가가 외래어 수입창구요, 전도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그너'와 '와그너', '비타민'과 '바이타민', '리오데자네이로'와 '리우데자네이루', '게놈'과 '지놈'이 혼재하는 이상한 사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 토박이말이 외래어로 대체되어 가는 추세를 주도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지식인들이라고 비판하면서 법철학·정치사상사·국어학·역사학 전공자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어나 외래어로 얼마나 어렵게 쓰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용어도 아닌 것을 학문용어인 것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쓰고 본인도 이해하지 못할 기묘한 문장을 써서 애써 글을 어렵게 하려는 태도를 학자들은 하루빨리 거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언어능력이 개인의 능력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국어뿐 아니라 영어도 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고 이런 아이들이라면 영어를 수십 년 배우더라도 세계인들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말 실력이 병행되어야 만이 진정한 '세계 속의 한국'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면 책 속에 나와 있는 본문의 일부만 적어보겠습니다.
복과 축복
나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거나 남이 하는 기도를 들으면 언제나 '복'과 '축복'이 혼동되어 쓰이고 있는 것에 몹시 곤혹스럽다. '복'은 '행복'과 비슷한 뜻을 가지는 말이고 따라서 목사나 교인들이 복을 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것이 못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한없는 축복을 내려 주시고…"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축복 기도를 듣거나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축복'이 무엇인가? 물론 '복을 비는 것'이 축복이다. 따라서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하거나 교인이 제 복을 비는 기도인 축복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절대자인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하거나 축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은 무슨 뜻인가?
'축복하다'는 말은 '복을 빌다'는 말이지 '복을 주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절대자에게 '축복해 주시오'하는 것은 '복을 빌어 주시오'하고 기도하는 셈인데, 이건 아무래도 사리에 맞지 않다. 하나님 위에 더 힘센 절대자가 있어서 하나님더러 그 절대자가 나와 우리에게 복을 내리도록 빌어 달라고 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기도인가? 복을 줄 수 있는 절대자에게 '복을 주소서'하고 빌어야지 '축복해 주소서'나 '축복을 내려 주소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독립선언서'와 '독립 선언서'
종로 3가에 있는 탑골 공원 안에는 1919년에 독립을 선언했던 선언문 글귀가 새겨진 구리판이 있다. 거기에는 '독립선언서'라고 한자로 내리쓰기를 한 글이 새겨 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묘한 문장도 함께 한자로 적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쓴 것이니 여기서 크게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을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에 옮겨 쓸 때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선언서'라고 하는 것보다는 '독립 선언서'라고 쓰는 것이 옳다. 물로 이를 좀더 우리말답게 '독립을 선언하는 글' 또는 '독립을 밝히는 글'이라고 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라고 쓰면 이 말이 한 낱말이 됨을 뜻하는데 그 뜻이 '독립 선언서'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선언서'와 '독립 선언서'가 모두 '독립함을 밝히는 글'이라는 뜻 이상의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어법에 맞게 '독립'과 '선언서'를 각기 별개의 낱말로 이해할 수 있도록 띄어 쓰는 것이 말글살이를 잘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언서'라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선언하는 글'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자신이 동사와 명사를 함께 갖춘 묘한 낱말인 셈이다. 마치 남녀 두 기능을 함께 갖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낱말 앞에 와서 합성되는 명사는 꼭 이 명사의 목적격 노릇을 하게 된다. '독립선언서'처럼 쓰게 되면 한 낱말에 타동사와 목적어 그리고 그것이 꾸며 주는 명사가 두루 섞여 있는 묘한 낱말이 된다. 우리가 한자말을 쓰더라도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견원지간'과 '뜨거운 감자'
아옹다옹 늘 다투면서 지내는 두 사람 사이를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이미 잘 알겠지만 '견원지간'은 '개와 원숭이 사이'를 가리킨다. 중국 사람들은 개와 원숭이가 만나면 늘 으르렁거리며 서로 다툰 것을 보았지만 우리는 '아옹다옹'이 가리키듯이 '고양이와 개'가 늘 다투는 것으로 보아왔다.
여기에서 '아옹'은 고양이 소리고 '다옹'은 개의 소리이다. 따라서 늘 다투는 사람의 관계는 '아옹다옹 관계'인 것이며 꼭 다투는 동물을 밝히고 싶으면 '고양이와 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식이다. 여기서 '와'나 '의'를 생략하려는 조급증은 버리는 것이 좋다.
비슷한 예로 영어를 직역하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뜨거운 감자'라는 말이 있다. 중요하지만 서로 비켜 가고 싶어서 멀리하는 문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은 뜨거운 것을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식사 습성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누구든지 먼저 입을 대는 사람이 손해를 입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뜨거운 감자'가 전혀 고약하게 피하고 싶은 골칫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뜨거운 감자'를 지금처럼 직수입하여 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뜨거운 감자'를 먹지 않게 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촌형님 부부가 모두 교사인 탓에 유치원에 종일 있는 사촌조카를 데려오기 위해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들은 아이들의 말에 좀 놀랐습니다.
그리고 너무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쓰던 말들도 그 때의 어른들 입장에서는 이질적으로 느꼈겠지만 말입니다.
창문 밖으로 별은 안 보이고 십자가만 보이는 밤입니다.
이 밤에도 부모님은 변함이 없이 심야기도회에 가신 모양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요즘 사무실에서 배운 바둑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작가가 되고 싶다면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작가뿐만이 아닙니다. 지름길을 찾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겨운 반복! 피나는 반복! 그것만이 그 무언가가 되는 길입니다.
전에 읽은 책冊중에 남영신이 지은 <말 잘하려면 국어부터 잘하고 외국말 잘하려면 한국말부터 잘해라>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저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건 제대로 쓰는 것입니다.
"야! 제 롱다리 정말 끝내주지 않니?"
"우와! 정말 울트라캡송 나이스짱이다. 그런데 난 이게 뭐야. 아! 열 받아."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한 토막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에 비해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훨씬 더 많아서인지 대체로 말을 참 잘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용어에 의문을 가진 뒤 아예 한글학자로 변신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6년 동안 배운 영어로는 외국인과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12년 동안 배운 국어는 제대로 쓰고 있는지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외국어의 탄탄한 기초가 되어야 할 우리말은 거꾸로 외국어에 의해서 오염되거나 정체성까지 파괴되어 왔다고 합니다. 한자시대에는 수많은 토박이말들이 한자로 바뀌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유식함의 표식인 양 마구 혼용되어 왔다고 말입니다.
예컨대 원래 '삼개'인 마포는 삼을 가리키는 한자어 마(麻)와 개를 가리키는 포(浦)를 붙여 만들었고, 서대문구 아현동의 이름인 아현(阿峴)은 원래 '작은 고개'라는 뜻의 '애오개'였는데 아현(兒峴)으로 쓰다가 요즘은 아현(阿峴)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공장의 창고에서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물건을 나르는 것을 대신한 '지게차'라는 용어는 점점 외래어 이름인 '포크리프트'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말글살이는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간 사람들이 각기 자기가 공부했던 곳에서 보고 배운 것을 우리나라에 옮겨 심는 것이 자신의 임무인 양 착각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크게 변질되어왔다고 저자는 또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학을 다녀 온 전문가가 외래어 수입창구요, 전도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그너'와 '와그너', '비타민'과 '바이타민', '리오데자네이로'와 '리우데자네이루', '게놈'과 '지놈'이 혼재하는 이상한 사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 토박이말이 외래어로 대체되어 가는 추세를 주도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지식인들이라고 비판하면서 법철학·정치사상사·국어학·역사학 전공자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어나 외래어로 얼마나 어렵게 쓰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용어도 아닌 것을 학문용어인 것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쓰고 본인도 이해하지 못할 기묘한 문장을 써서 애써 글을 어렵게 하려는 태도를 학자들은 하루빨리 거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언어능력이 개인의 능력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국어뿐 아니라 영어도 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고 이런 아이들이라면 영어를 수십 년 배우더라도 세계인들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말 실력이 병행되어야 만이 진정한 '세계 속의 한국'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면 책 속에 나와 있는 본문의 일부만 적어보겠습니다.
복과 축복
나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거나 남이 하는 기도를 들으면 언제나 '복'과 '축복'이 혼동되어 쓰이고 있는 것에 몹시 곤혹스럽다. '복'은 '행복'과 비슷한 뜻을 가지는 말이고 따라서 목사나 교인들이 복을 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것이 못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한없는 축복을 내려 주시고…"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축복 기도를 듣거나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축복'이 무엇인가? 물론 '복을 비는 것'이 축복이다. 따라서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하거나 교인이 제 복을 비는 기도인 축복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절대자인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하거나 축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은 무슨 뜻인가?
'축복하다'는 말은 '복을 빌다'는 말이지 '복을 주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절대자에게 '축복해 주시오'하는 것은 '복을 빌어 주시오'하고 기도하는 셈인데, 이건 아무래도 사리에 맞지 않다. 하나님 위에 더 힘센 절대자가 있어서 하나님더러 그 절대자가 나와 우리에게 복을 내리도록 빌어 달라고 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기도인가? 복을 줄 수 있는 절대자에게 '복을 주소서'하고 빌어야지 '축복해 주소서'나 '축복을 내려 주소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독립선언서'와 '독립 선언서'
종로 3가에 있는 탑골 공원 안에는 1919년에 독립을 선언했던 선언문 글귀가 새겨진 구리판이 있다. 거기에는 '독립선언서'라고 한자로 내리쓰기를 한 글이 새겨 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묘한 문장도 함께 한자로 적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쓴 것이니 여기서 크게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을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에 옮겨 쓸 때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선언서'라고 하는 것보다는 '독립 선언서'라고 쓰는 것이 옳다. 물로 이를 좀더 우리말답게 '독립을 선언하는 글' 또는 '독립을 밝히는 글'이라고 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라고 쓰면 이 말이 한 낱말이 됨을 뜻하는데 그 뜻이 '독립 선언서'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선언서'와 '독립 선언서'가 모두 '독립함을 밝히는 글'이라는 뜻 이상의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어법에 맞게 '독립'과 '선언서'를 각기 별개의 낱말로 이해할 수 있도록 띄어 쓰는 것이 말글살이를 잘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언서'라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선언하는 글'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자신이 동사와 명사를 함께 갖춘 묘한 낱말인 셈이다. 마치 남녀 두 기능을 함께 갖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낱말 앞에 와서 합성되는 명사는 꼭 이 명사의 목적격 노릇을 하게 된다. '독립선언서'처럼 쓰게 되면 한 낱말에 타동사와 목적어 그리고 그것이 꾸며 주는 명사가 두루 섞여 있는 묘한 낱말이 된다. 우리가 한자말을 쓰더라도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견원지간'과 '뜨거운 감자'
아옹다옹 늘 다투면서 지내는 두 사람 사이를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이미 잘 알겠지만 '견원지간'은 '개와 원숭이 사이'를 가리킨다. 중국 사람들은 개와 원숭이가 만나면 늘 으르렁거리며 서로 다툰 것을 보았지만 우리는 '아옹다옹'이 가리키듯이 '고양이와 개'가 늘 다투는 것으로 보아왔다.
여기에서 '아옹'은 고양이 소리고 '다옹'은 개의 소리이다. 따라서 늘 다투는 사람의 관계는 '아옹다옹 관계'인 것이며 꼭 다투는 동물을 밝히고 싶으면 '고양이와 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식이다. 여기서 '와'나 '의'를 생략하려는 조급증은 버리는 것이 좋다.
비슷한 예로 영어를 직역하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뜨거운 감자'라는 말이 있다. 중요하지만 서로 비켜 가고 싶어서 멀리하는 문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은 뜨거운 것을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식사 습성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누구든지 먼저 입을 대는 사람이 손해를 입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뜨거운 감자'가 전혀 고약하게 피하고 싶은 골칫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뜨거운 감자'를 지금처럼 직수입하여 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뜨거운 감자'를 먹지 않게 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사촌형님 부부가 모두 교사인 탓에 유치원에 종일 있는 사촌조카를 데려오기 위해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들은 아이들의 말에 좀 놀랐습니다.
그리고 너무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예전에 제가 어릴 때 쓰던 말들도 그 때의 어른들 입장에서는 이질적으로 느꼈겠지만 말입니다.
창문 밖으로 별은 안 보이고 십자가만 보이는 밤입니다.
이 밤에도 부모님은 변함이 없이 심야기도회에 가신 모양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요즘 사무실에서 배운 바둑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