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각해 봅시다...

조회 수 3034 2002.04.07 04:20:14
토미
  네팔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내 제자의 말에 따르면 그 나라는 관광자원을 무척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국의 관광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네팔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참으로 부럽다...

  민재기 건국대 교수가 쓴 <함께 생각해 봅시다>에 나오는 구절을 글의 서두書頭에 적어보았습니다.
  끝내지 못하고 가져온 일을 마치고서, 선배에게 선물로 받은 우롱차烏龍茶를 마시며 읽고 있는데 공감이 가는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책의 본문을 적어볼까 합니다.
  이 책에 대한 제 느낌보다는 아무래도 본문의 일부라도 적는 것이 읽는 님들에게는 더 좋을 거 같아서요.

     맙소사!

  바로 어제 읽은 글 가운데 아주 깜찍한 콩트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김민숙 님의 『담배 피우는 여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영수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빠져나가 버렸다. 유치원 가방은 제 방문 앞에 내팽개쳐 둔 채. 가방을 녀석의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침대 위에 던져져 있는 반바지를 들고 나와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고 난 뒤부터는 친구에게 재미를 붙였는지 도대체 집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 전에는 몇 시간씩 동화집을 붙들고 씨름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느라고 도무지 다른 애들과 어울려 놀지를 않아서 사내 녀석이 저래도 될까 걱정이 되던 참이었는데, 요즈음은 밥 먹을 때 외에는 얼굴 보기조차 힘들다.

  여섯 살짜리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내 품을 벗어난 것처럼 서운하기도 하다. 빨래를 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는 동안 빨래통을 내려놓고 옷을 분류 하다가 영수의 반바지를 물 속에 막 집어넣으려는데 손끝에 뭔가 잡힌다. 주머니 속에 뭔가가 들어 있다. 물 묻은 손을 대충 다른 빨래에 비빈 후 포켓 속에 손을 넣었다.

  딱지 비슷하게 네모로 접힌 종이다. 딱지인줄 알고 마루에 던져 놓으려는데 거기 녀석의 지렁이 기는 듯한 글씨가 보였다. '혜린에게'...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확 치민다. 영수가 유치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그 여자아이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영수는 꽤나 그 혜린이라는 아이에게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온통 자랑하고 다니던 애였다.

  "혜린이가 엄마보다 더 예뻐?"

  나의 이 엉뚱한 질문에 한동안 몹시 곤란한 눈치더니, 마침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럼 엄만 섭섭해서 어떡하니?"

  이 말에 그 녀석 불쑥 한다는 말이,

  "엄만, 아빠가 있잖아."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다. 내겐 큰 충격이었다. 식탁에서도 그 애는 달라져 있었다. 편식을 하면 키가 크지 않는다고 협박을 해도 고기만 먹던 아이가 요즈음엔 식탁에 놓인 음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먹어치운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자못 심각한 얼굴로,

  "혜린인 나보다 키가 크단 말야!"

  했다. 혜린이의 키가 저보다도 크다는 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 애는 날마다 제 방 벽에 붙어 서서 키를 재는 습관이 생겼다.

  "왜 혜린이보다 꼭 커야 하니?"

  했더니, 또 퉁명스럽게

  "아빤 엄마보다 크잖아!"

  라고 쏘아붙였다.

  "그럼, 혜린이를 네 색시로 삼을 거니?"
  "응. 밥 많이 먹고, 빨리 커서."

  그렇게 결의에 차서 열심히 먹어대던 애가 요 며칠 사이에 좀 풀이 죽은 듯해 보였다. 나는 몇 번이나 네모나게 접은 그 종이딱지를 펼쳐 보았다. 혜린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분명했다.

  '혜린아, 너 왜 편지 답장 안 하니? 안종철이가 주는 초콜렛은 왜 받니? 다음부터는 절대 받지 마. 내가 사줄께, 이번에는 꼭 답장해야 돼. 알았지?'

  맙소사!
  빨래통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아들의 러브레터를 들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여섯 살짜리라 해도 아들애의 연애편지를 아는 척하기가 민망스러워 편지를 접어서 녀석의 방에 몰래 갖다 놓았다.

  영수는 저녁때가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놀이터에도 가보고, 이웃집에 인터폰도 해봤지만 아무도 오늘 영수와 놀았다는 아이가 없었다. 불안해서 아파트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유치원에도 가 봤지만 어디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더욱 불안해졌다. 남편의 회사에 전화를 걸고는 관리실에 막 방송을 부탁하려는 참인데, 초인종이 울렸다. 바로 영수였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너, 어딜 갔었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왔다.

  "도대체 온종일 어디 갔다 왔니? 엄마가 얼마나 찾아 다닌줄 알아? 어딜 가면 얘길 하고 가야 할 게 아냐."
  "소방서에 갔었어."
  "거긴 왜?"
  "혜린이랑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그럼, 잠시 놀다 들어올 거지. 지금까지 뭘 한 거야. 날이 어두웠잖아, 혜린이네 집에서도 얼마나 걱정들 하셨겠니."
  "혜린이는 안 왔단 말야."
  "혜린이도 안 왔다면서 혼자서 하루 종일 거기서 뭘 했어?"
  "기다렸지, 뭐."
  "뭐,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고 서 있었단 말야? 그럼, 도대체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은 몰라. 그냥 소방서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맙소사!
  나는 더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단 5분도 기다리길 싫어하는 제 아빠와는 전혀 다른, 이 여섯 살짜리 아들의 실연(?)을 과연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귀엽고 깜찍한 내 아들 녀석, 여섯 살에 벌써 뼈아픈 실연(?)이라...
  맙소사!

     아버지와 아들

  역사를 바로 읽게 되면 옷깃을 여미게 되고, 역사를 바로 알게 되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역사를 '거울'감鑑자에 비유했다. 역사를 기록한 책을 通鑑통감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역사를 바로 살피는 첩경은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사를 단편적으로 끊어서 이해하려고 들면 대단히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역사에는 오묘한 흐름이라는 게 있고, 더 나아가서는 엄숙한 법도法道라는 게 있음을 유념하여야 한다.

  1895년 10월 8일. 일제日帝는 주한 일본공사인 미우라의 지휘로 50여 명의 군인·경찰·낭인·신문사 사장 등을 동원하여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잔혹무도한 대죄를 범했다. 그래서 이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 우범선은 곧 일본으로 망명해 버렸다.

  사건 당시 범인 우범선의 공식 직함은 조선군 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고, 계급은 참령이었다. 일본으로 간 우범선은 동경과 고배를 거쳐 구레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5살 난 아들을 두고 있었다.

  1903년 11뭘 24일. 우범선은 민비의 심복과 같았던 고영근에 의해 망명지 일본땅에서 드디어 47세의 나이로 암살된다. 이 사건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아무런 상관없는 개인의 원한이라면 여기서 모든 게 끝나야 옳지만, 역사의 흐름이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우범선이 암살된 일본 구레시의 와쇼마찌 2,079번지는 흉지凶地로 낙인 찍혀서 오늘날도 집을 짓지 못하는 빈터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 몹쓸 암살범의 아들은 이런 기막힌 사연도 모른 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1950년 3월 8일. 육종학育種擧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장춘冷點象 박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의 나라 일본 땅에 자기 어머니와 아내와 2남4녀를 남겨 둔 채. 그가 바로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우리 민족의 원수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아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였다. 지극히 안락한 연구환경과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행복한 생활을 철저히 보장받는 극히 부러운 자리에 있었건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혈혈단신으로 농업환경이 척박하고 연구시설 이 전무全無한 아버지의 나라인 반쪽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 운명의 아이러니!

  그는 왜 돌아왔을까? 왜?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피를 토하며 죽어 간 아버지 우범선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민족의 발아래 엎드려 참회하며 속죄하려고 온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농업환경이 열악한 이 땅에 육종학을 한번 꽃피워 보고 싶은 순수한 학자적 야망에서일까?

  아버지 우범선과 그 아들 우장춘의 이 기막힌 부자간의 갈등은 개인사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명성황후 시해'라는 우리 민족사의 흐름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역사의 향배를 따르는 필연적 결과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머지는 후세 사가史勳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여기서 생각나는 이야기 한 가지만 더 하려 한다. 일제가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강점했을 때, 이른바 <매국오적>이라고 불리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죽자, 그의 후 손들이 '호화분묘'를 만들었는데, 그 무덤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사치스러워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대단하구먼, 누구의 무덤이지?" "매국노 000의 무덤이라네." "더러운 놈‥‥‥!"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덤을 향해 저마다 퉤!퉤! 하고 침을 뱉었다.

  호화분묘 꾸민 후손들, 정말 자랑스럽겠네? 죽은 사람이야 매국한 대가로 당대의 영화를 누렸겠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창피함을 느꼈던지, 결국 무덤을 다 깎아 내고 평묘平墓를 만들었다지?(못난 것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그 조상에 그 자손이라.)

  죽은 조상에게는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것이지만, 그제야 침을 뱉는 사람은 없어졌고, 자손들은 치욕의 구설수에서 다소 벗어났다. 당대의 악행으로 잠시 누렸던 영화가 그 자손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은 역사가 내린 준엄한 심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존엄성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가 역사의 울타리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편린들이지만, 결코 당대에서 끝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때묻은 코트는 빨아 입으면 그만이지만,
    때묻은 역사는 결코 지울 수가 없는 법!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는데, 첫 번째 글은 적으면서 미소가 나왔는데, 두 번째 글은 서글픔과 쓴웃음이 나옵니다. 이유는 님들도 다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주일입니다. 위의 글을 보니 교회에 가서 기도할 제목이 생겼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소리를 듣습니다.
     갈매기의 울음 속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를 뒤쫓는 바람 속에서
     어린 아이의 속삭임에서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동물 형상의 뭉게구름 속에서
     수십 년 묵은 나무에서
     구십이 넘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사랑을 음미합니다.
     검은 빵 속 달콤한 밀알에서
     한 다발의 이름 모를 들꽃의 그윽한 향기에서
     손바닥 가득 떠올린 맑은 개울물에서
     사랑의 내음을 맡습니다.
     비에 씻긴 신선한 공기에서
     방금 썰은 양파에서
     가을날 포도 위에 겹겹이 깔린 낙엽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댓글 '1'

세실

2002.04.07 09:34:22

오늘은 토미님 덕분에 막연히 육종학자로만 알고있던 우장춘박사에 대해 새로운 걸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친일파,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역으로 하기엔 그 시대가 주는 갈등이 너무 커네요. 우리들은 시시때때로 이분법으로 나눌려고하죠. 난 어디에 조금이라도 더 치우쳤을까? 뭐가 궁극적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겠나? 그 땐 정말 판단하기어려웠겠죠. 전 일제당시 친일파라해서 무조건 돌던지진않습니다. 제 스스로 신념의 인간이 아니므로 돌 던질 자격이 없죠. 때로 그런 격동의 시대에 선택의 순간을 맞딱드리지않은 삶에 고마워하기도하죠. 비겁한가요? 어쨌든 오늘 한 인간의 숙명적 고독과 위대함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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