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16] 녹차향

조회 수 2997 2003.06.10 09:23:11
소리샘
[상혁씨..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내 수첩에서 떨어진 상혁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주워 건네주고는 그가 물었다.
[글쎄요..? ]
[상혁씨.. 사랑해요? ]
상혁일 사랑하냐는 그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
우린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다.
그걸 알면서 나에게 상혁일 사랑하냐는 질문을 하는 건 어찌보면 실례인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 결혼을 약속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니까.
그럼에도 그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그동안 내가 상혁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도록 보였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상혁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난 또 뭔가...  
[그런 질문이 어딨어요? 우린 약혼한 사이에요. ]
난 상혁일 사랑한다는 대답 대신 그를 핀잔하는 것으로 말을 돌렸다.
[아.. 그렇지.. 그럼 말해봐요. 상혁씨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
[상혁인.. 누구보다도 날 잘 알구요.. 천성적으로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어릴적부터 가족처럼 지내왔구요.. 이해심도 많고.. 책임감도 강하고.. 또.. ]
난 상혁이의 좋은 점들을 열심히 설명해 나갔다.
[하하.. ]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
[아뇨.. 그냥... 좋아하는데 이유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
또 한번 멈칫..
[아니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요. ]
[그렇게 생각해요? 음...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좋은 이유 대봐요. ]
[네? ]
난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못 대죠? 정말 좋은 건 이렇게 이유를 댈 수 없는 거에요. ]
그는 금방이라도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나 보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살짝 눈길을 돌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럼 진짜로 예를 들어볼까요?
강준상..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이유 댈 수 있어요? ]  
우뚝.. 걸음을 멈췄다.

준상일 좋아했던 이유... 이유가... 있었던가..?
그애를 보면 심장에서 뭔가 툭.. 떨어지던 느낌.. 그리고.. 그냥 좋았다.
오랫동안 함께 한 편안함도 없었고..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도 몰랐고..
언제나 우울하고 차갑기만 했던 그애.. 그런데도 그냥 그애가 좋았다.
정말 그러네...?
이유를.. 댈 수가 없어..

[미안합니다. ]
순간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그가 난처해하며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미안할 거 없어요. ]
다시 걸음을 옮겼다.
[또 나왔다. 내가 아는 표정. ]
그는 장난끼 어린 얼굴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가 했다.
하지만 곧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닫고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이 사람에겐 숨길 수가 없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얼굴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건가...
[그냥.. 나한텐 편하게 해도 되요.. 생각나면 생각하고.. 나보고 되새김질도 하고.. ]
난 한발자국 뒤에서 따라 걸으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나지막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내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 ..그래도 되요.. 그러다가.. ]
난 슬몃 미소를 지으며 길가 돌난간에 풀쩍 뛰어 올랐다.
그는 깜짝 놀랐는지 말을 멈추고 날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아 나갔다.

이러는 거.. 얼마만 인지..
어느덧 그가 편해진 건가..
내 과거의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이해해 주는 사람..
여태까지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어쩐지.. 이젠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혁이와 함께 했던 그 시간 속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런 느낌..

[준상이하곤 별로 한 게 없어서 되새김질할 것도 없어요.
학교에선 둘이 맨날 싸우고.. 호수가에서 땡땡이치고 데이트 한 번하고..
그리고 첫눈 오는 날 눈사람 만들고..
.... 정말.. 한 게 없네...? ]
눈물이 핑 돌았다.

나쁜... 정말 너 나빠.
그렇게 너 혼자 일찍 가버리니까 좋으니..?
너와 함께 한 추억이 이렇게 겨우 몇 가지뿐이라니..

[어어... ]
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달려와 넘어지려는 날 붙잡는 그의 팔..
난 그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겨 있다가 얼른 몸을 떼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얼굴은 붉어지진 않았는지..
혹시 그걸 그가 눈치채진 않았을까..
옷매무새를 고치는 척 괜시리 이리저리 옷자락을 툭툭 쳐냈다.

[유진아! ]
정아언니의 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에게 안겼던 모습을 언니가 본 건 아닐까.. 하는 당황함도 잠시..
언니가 다급하게 전하는 소식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유진아. 어떡하니? 춘천 어머님이 쓰러지셨대. ]
엄마...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쓰러지다니...
어떡하지...? 어떡해...
언니에게 차 키를 받아들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추스리며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난...
[유진씨! ]
키를 막 꽂으려는데 언제 왔는지 그가 날 불러 세웠다.
[차 키 있죠? 좀 줘봐요. ]
[네? 왜요? ]
[얼른요. ]
얼떨결에 키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키를 든 손을 얼른 감싸쥐며 돌아섰다.
[내 차로 가는 거에요? 와요. ]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차가 있는 곳까지 따라갔다.
[타요. 어서요. ]
[저기... ]
[빨리 가야하잖아요. 어서요. ]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차에 올랐다.

[운전하기 위험하다고 했으면 유진씨가 내 말 들었겠어요?
이런 빙판길은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어요. ]
그의 말이 맞았다.
눈이 녹아 얼어붙은 곳이 길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지금 이런 정신없는 상태에서 운전했다면 혹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배려가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집에 간다는 것이 맘에 걸렸다.
엄마가 어떻게 볼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엄마가 쓰러졌다는 것.. 그리고 빨리 가야한다는 것.. 그게 더 중요했다.

춘천 시내로 들어서자 더 조바심이 났다.
신호등 바뀌는 시간조차 답답할 지경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 뛰어 올라갔다.
문을 열자 희진이가 날 맞았다.
[희진아. 엄마는? ]
[의사선생님 다녀가시고 많이 좋아지셨어. ]
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희진인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이렇게 달려오지 않아도 될걸 그랬는데... ]
그때 그가 집에 들어섰다.
그를 본 희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준상.. 오빠..? ]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당황한 눈빛.. 난 얼른 정정해주었다.
[아니야. 희진아.. 준상이 아니야. ]
그래도 희진이의 얼굴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왔니? ]
방에서 엄마가 나오셨다.
[엄마. 괜찮아? ]
[유진이 니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누구...? ]
문앞에 서있던 그를 발견한 엄만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나 일하는 스키장 공사 책임자셔.. 나 데려다 주셨어. ]
난 그가 난처해할까봐 의아해하는 엄마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엄만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같이 오는 거 아니다. 일만 같이 하는 거 맞지? ]
[엄마.. ]
엄마가 이런 염려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까지 함께 올 정도니.. 혹시나 하는 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일까..
그냥 엄마의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러기엔 내 맘이 명쾌하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잔뜩 끼인 곳에 서 있는 것 마냥.. 답답할 뿐이었다.
[상혁이한텐 말하지 마라.. 콜록.. 콜록 ]
엄마의 기침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엄마.. ]
엄마는 기침을 하기에도 힘겨워 보였다.
눈물이 울컥 솟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그런데 왜 나한텐 한마디도 안했어. ]
[너.. 사부인은 자주 찾아 뵙니? ]
엄만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먼저 상혁이 어머니 얘기부터 물었다.
[ ...그럼.. ]
[용서는 해 주신거야? ]
[그럼 엄마.. 걱정하지마. ]
[상혁이한테는 잘 하구? 자주 전화하고 그러지? ]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며.. 울컥 울컥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냈다.
여전한 상혁이 어머니의 냉대.. 그리고 상혁이와의 삐걱거림..  
그것들이 새삼 내 맘을 무겁게 짓눌렀다.
나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을 엄마..
엄만 내가 걱정할까봐 아픈 것도 내색하지 못했는데.. 난.. 엄마에게 걱정만 안겨드렸다.
엄마가 이렇게 아픈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은 죄스런 마음에 또 한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런데.. 저 사람..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애.. ]
엄만 문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엄만 준상일 본 적이 없는데..
난 그냥 무심히 넘겨 버렸다.

나오려는 엄말 억지로 자리에 눕히고 집을 나섰다.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희진이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나서야 차에 올랐다.

차안에서.. 그도 나도.. 서로 말이 없었다.
춘천에 올 때보다 맘이 더 심난했다.
아픈 엄마를 두고 가는 것도.. 또 상혁이와의 문제도.. 기분이 한없이 착찹했다.
그도 그리 썩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까 희진이가 준상이로 착각한 것이 맘에 걸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 오늘 땡땡이 칩시다. 어차피 지금 올라가도 일 다 끝났을텐데.. ]
그리곤 그는 익숙한 곳인냥 나에게 묻지도 않고 이리저리 차를 몰았다.

그가 차를 세운 곳은 호숫가였다.

****************************************
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님 글방 펌



  
  

댓글 '1'

달맞이꽃

2003.06.10 20:28:47

소리샘님 ..
고맙습니다 ..
늘 감사해요 ..글 잘 읽고 갑니다 ..후후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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