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셜리
우리를 욕하지 말라! 단지 섹스를 원했을 뿐


길에서 지나가면 한번쯤 뒤 돌아보게 만드는 수려한 외모, 부담스럽지 않을 선에서 여자를 매혹시키는 깔끔한 매너, 알마니도 울고 갈 스타일을 선보이는 패션감각,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의 속 깊은 욕망을 꿰뚫어 볼 줄 아는 타고난 선수의 본능. 게다가... 다양한 종류의 섹스 테크닉까지 옵션으로 달고 나온 그야말로 퍼펙트한 수컷 한 마리가 이 지구상에 나타났다!!

진영(추상미), 선영(최지우), 미영(김효진)이라는 어딘가 한 가지씩은 삶의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여인들은 얼핏 보면 이 외계인 같은 바람둥이에게 ‘당했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막내 동생의 남자와 한번씩 섹스를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평생 동안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을 것이요,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짐을 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 영화를 즐길 수 없는 현실주의자이다.

시간은 점프해 엔딩씬을 살짝 엿보면, 진영 선영 그리고 미영은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잠시만 버려둔다면 진실로 당한 사람은 바로 이 외계인 같은 수컷이라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터.

* 자극제는 자극제일 뿐, 결혼은 no! - 여자 선수 미영(김효진)의 이야기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말 잘 듣는 착한 남자... 아는 사람은 알 거야. 그게 얼마나 재미없는 연애인지. 다 양보한다 해도 도무지 걔랑 하는 섹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깨끗하게 잊어주는 게 상부상조하는 거 아니겠어? 동의할지 모르지만 여자들도 말 잘 듣는 발바리보다 튕기는 매력이 있는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족속들도 있다구.

...설마 설마 했는데 나처럼 기가 센 여자에게도 내 마음을 흔들어 버리는 수컷을 만날 줄이야! 선수라고 자부하는 나조차 도저히 그 타이밍을 예상할 수 없는 갑작스런 키스, ‘너 가지고 싶어’라고 말 할 때 옵션으로 겸비해야 할 그 진지한 눈빛. ‘하지만 네가 원할 때’라고 못 박음과 동시에 불타오르는 나의 정복력!! 나 같은 선수에게도 결혼할 상대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

그런데...그런데 말이야. 날 자극시키던 그 사람의 매력도 점점 재미가 없어지더군. 멋진 남자에게 길들여지자니 또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그 착한 머슴이 눈에 자꾸 아른거리는 거야. 이 외계인 다른 건 다 완벽한데 과연 그 머슴처럼 날 평생 동안 기다려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역시 자극제는 자극제로서 역할만 하면 끝나는 거라는 걸 알았어. 자극제를 통해 착한 남자의 효용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에겐 좋은 공부가 된 거지. 물론 그 자극제와 함께 나누었던 환상적인 섹스는 잊을 수 없겠지만 말이야.

* 섹스는 섹스일 뿐 - 사랑의 속성에 눈뜬 선영(최지우)의 이야기

아마도 수현씨(이병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 처음 섹스한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썰을 지금까지 믿고 살았을 거에요.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고 혹시나 그 사람이 멀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남자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라는 말을 알고는 있지만 사랑을 철썩 같이 믿고 사는 여자들에겐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죠.

사랑에 무게를 실으면 실을수록 사랑이 주는 부담감 때문에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더군요. 말도 안 되는 관계의 남자와 섹스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깨지고 아파하는 과정이 모두 성숙의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더 중요한 깨달음은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전이라는 거. 남자의 심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건 두고두고 수현씨한테 고마워해야할 부분이거든요. 그게 아니었음 난 아직까지 바나나나 버섯만 봐도 소름이 끼치는 바보 같은 여자가 되었을 거에요.


* 나도 여자였다 - 외도를 통해 여성성을 회복한 진영(추상미)의 이야기

부부끼리 하는 섹스는 근친상간이라며 잠자리를 회피하는 남편을 둔 여자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 여자는 결혼이후에 성욕구가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 터.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성욕이라는 것을 꽁꽁 묶어두고 살기로 마음먹었더랬다. 어디까지나 난 품위와 고상함을 유지해야 하는 잘 나가는 의사의 부인이니까.

하지만 그가 ‘목선에 아름답네요.’ 하면서 나의 숨겨진 목을 드러내주는 순간 나는 내 안에 숨겨 두었던 여성이 꿈틀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영이하고도 섬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그래서 이 수컷에게 더 끌린다고 하면 난 미친 아줌마일까?

비록 동생의 결혼식 날 신랑이 될 남자와 섹스를 했다는 비밀을 안고 살아야 하지만 난 그날의 섹스가 나의 여성성을 회복시켜 주었음을 확신한다. 나의 성감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 것에 비한다면 그까짓 죄책감은 훌훌 날려줄 수 있다.

확신하건데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과론적으로 세 여자는 이 외계인 같은 남자를 이용했고 수현마저도 그들을 사랑했지만 진심은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이다. 비밀, 특히나 섹스와 연관된 비밀은 시간이 지나면 삶의 자극제가 될 수 도 있다. 교과서대로만 살아간다면 이 새털 같은 인생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물론 중요한 것은 그 비밀이 한 번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며 이 영화에서처럼 동생의 남자를 넘보는 위험천만한 비밀일랑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쿨하게 떠날 줄 아는 남자는 드물기 때문에.

- 김민영 기자(minwkd@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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