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의 겨울연가 [4] 녹차향

조회 수 3063 2003.05.19 01:12:40
소리샘

지난 며칠 간.. 내내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했다.
상혁이에게 본의 아니게 민형씨와의 일을 숨겼던 것이 맘에 걸렸다.
민형씨와 같이 일을 한다는 것..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
내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고.. 민형씨를 민형씨 만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면..
상혁이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젠간 상혁이도 알게 될 일.. 이렇게 숨겨선 안 되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상혁이가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털어놓으려 마음을 먹어도 쉽게 그 얘기를 털어놓지 못했다.
하루하루.. 불안함과 고통 속에서 흔들렸고..
그를 만나고 나서.. 난 10년 전 준상이가 떠난 후 그때의 나처럼.. 조금씩 웃음을 잃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준상일 떠나보낸 것이 더 힘들었는지..
아님 준상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서 준상일 다시 떠올리는 것이 더 힘들었는지..
하지만 아니라고 차마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민형씨를 보면서 준상일 떠올리는 것이 날 힘들게 했지만.. 맘 한구석에선 그래도 원하고 있었으리라..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기 전 스키장 답사는 언니가 다녀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에 일이 생겼다며 나에게 다녀오라고 전화가 왔다.
김 차장님과 다녀오는 거라니까.. 일단은 안심하면서 마르시안으로 갔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민형씨였다.
당황했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불안한 마음으로 민형씨 차에 올랐다.  
스키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그를 대하는 내 태도는 차가웠다.
되도록 사적인 대화는 피하고 싶었고..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불쾌했다.
아니.. 실망스러웠다는 것이 맞을까..
여자를 많이 겪어 본 바람둥이 같은 모습에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준상이라면.. 저렇지 않았을 텐데..
난 무의식 적으로 그와 준상일 비교했고.. 준상이와 다른 그의 모습에 그런 맘이 들었던 것 같다.
아직도.. 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그가.. 살아 돌아온 준상이기를... 그렇게...

스키장의 온통 새 하얗게 쌓인 눈이 지금이 한겨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얀 눈은.. 나를 10년 전 호수가로 데려다 놓았고.. 순간 순간 그가 준상이로 보이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재의 스키장과 과거의 호숫가를 오가는 내게.. 그의 모습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카메라 앵글에 우연히 들어온 그를 필름에 담으며.. 그를.. 아니 준상일 뒤쫓고 있었다.

신지구에서 구지구로 가는 길에 그가 나에게 물었다.
[유진씬 결혼하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요? ]
결혼하고 살 집...?
그의 말에 내가 곧 상혁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
[그래요? 이상하네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러지 않나요?
현관은 어떻고.. 침실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다.. 뭐 이런 식으로.. ]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할 텐데..
그들에겐 서로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텐데..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
[그럼 뭐가 중요해요? ]
[외형적인 집은 문제가 안 된다고 봐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서로의 마음이 좋은 집이잖아요. ]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던 카페에 들어갔다.
그는 난로에 불을 피우며 나에게 불 옆으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난 쉽사리 그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한 공간에 또 그와 단 둘이 있게 된 것이 못내 어색하고.. 떨렸다.
괜히 더 열심히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둘러보게 된다.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돼요.. 안그래도 충분히 감동받고 있으니까..
이리와요. 신발 안 말려요? ]
마지못해 그의 말대로 난로 가에 가서 앉았다.
그가 내 젖은 신발을 가져다 난로 옆에 가지런히 세워놓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학교 담장 위에 앉은 내게 묵묵히 신발을 신겨주던 준상이..
약간 고개를 숙인 그의 옆모습은 그때의 준상이와 너무 닮아있었다..
[어디서.. 고등학교 나오셨어요? ]
그는 내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백 번도 더 묻고.. 확인 해 보고 싶었던 것들..
준상이와 다른 사람이란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그와 마주할 때마다 속이 까맣게 탔었다.
혹시 그저.. 잊어버린 건 아닐까.. 정말.. 다른 사람이 맞는 걸까..
그동안 속으로만 꾹꾹 눌러왔던 질문이 한번 터지자.. 내 입에서 쉴새없이 말이 이어졌다.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냐구요.. 미국에서 다녔어요? 정말.. 미국에서 다녔어요? ]
[네.. 미국에서 다녔어요. ]
[춘천.. 춘천 알아요? 춘천 제일고등학교.. 기억 안나요? 한국에서 산 적.. 한번도 없어요? ]
그는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음을 흘린다..
[한가지씩 물어봐요.. 유진씨..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요? ]
[안경.. 안경 한번만 벗어 보실래요..? 한번만.. ]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어 안경을 벗겨 내려고 했다.
그는 놀라서 흠칫 몸을 뒤로 젖히고..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유진씨.. ]
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가..
겨우 제 정신을 찾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죄송합니다.. ]
[유진씨.. 나 볼 때마다 이상해지는 데.. 그러는 이유.. 말해 줄 수 있어요? ]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얘기하자.. 모두 다 얘기 해 버리자..
모두 다 털어놓고 나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내 맘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도 이상했던 내 행동을 이해해 주리라..
[내 말.. 믿어 줄 수 있어요..? 사실은 민형씨.. ]
똑똑..
[아.. 아까 커피 부탁했는데.. 가져왔나봐요. ]
그가 일어서 문을 열었다.

[잡았다! ]
채린이다..
뜻밖의 채린이의 등장에 난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를 본 채린이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굳었다.
난 무슨 죄를 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서 가는 그와 채린이의 모습에.. 웬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채린이의 애인이고.. 그런 그의 다정한 모습은 당연한 것인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할까..
그가 다른 사람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채린이의 등장으로 깨졌다는 것이 아쉬웠을까..
좀더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끝내 부정하지 못하는 나..
아직도 준상이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내 자신이 안타까웠고..
그에게서 준상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어떡하면 좋을까..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차라리.. 잘 된건지도 몰라..
그가 그 사실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도 괜히 마음이 쓰일꺼고.. 죽은 사람과 닮아서 그랬다는 거.. 알아서 뭐가 좋겠어..
채린이도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내가 먼저 말한다는 건 주제넘은 건지도 몰라..
그래.. 차라리 잘됐어..

서울로 돌아오는 채린이 차안에서.. 우린 누구도 서로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밝게 말하던 채린이도 차에 오르자 얼굴이 굳은 채 말이 없었고..
나도 뭐라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채린이에게 눈치가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래도 분명 채린이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묻지 않는 채린이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힘겨웠다.
  
서울로 돌아오자.. 힘겨운 일은 또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혁이는 초조하고 초췌해보였다.
문득.. 스키장에서 상혁이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정아언니와 함께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또 상혁이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조금은 싸늘해보이는 상혁이의 얼굴에 주눅이 들었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일 없니..?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 없어.. ]
[그래..? 니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

상혁이도 조금씩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겠지.. 상혁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내 태도가 이상하다는 걸 왜 모를까..
그런데.. 왜 난 끝내 상혁이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어차피 다 알게 될 일.. 숨긴다고 영원히 모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상혁이의 태도가 겁이 났던 것일까..
상혁이도 민형씨의 존재가 무척이나 신경쓰였을 거고..
내가 민형씨를 계속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날 그대로 두지 않을 꺼란 걱정이 앞섰던 것일까..
상혁이의 마음보다도.. 난 그것이 더 맘에 걸렸던 건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 뒷편에 그를 계속 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마음이 날 그렇게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
겨울연가 사람들  녹차향글방 펌








댓글 '6'

달맞이꽃

2003.05.19 09:03:12

소리샘님 ..오늘도 어김 없이 유진에 얘기는 계속되는군요 ..후후후후~~~~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입니다 ..좋은 계획 세우셔서 활기찬 한주가 되시길 바람니다 ..행복하세요 ^^*

운영자 현주

2003.05.19 11:43:54

방송에서 이 장면 나왔을때..정말 눈물 났었지요..그리고 지우님 연기력에 대해서도 극찬이 나왔던 부분이기도 하구요..^^ 소리샘님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녹차향님의 글은 유진의 마음이 정말 꼭 저랬을거같이 잘쓰시는거같아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소리샘님~~

온유

2003.05.19 19:34:10

오늘은 글 보다도 이 음악이 절 뭉클하게 하네요.
준상이가 유진이랑 헤어지려고 마음먹고 바닷가에서 이것 저것(?)던질때 이 음악이 흘렀었죠.......
뭔 눈물이 그렇게 흘러 내리던지요...준상이가,유진이가 너무 안됐구 불쌍해서 잠까지 설쳤더랬습니다.
소리샘님 올려 주시는 글 소중히 보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코스

2003.05.19 22:39:26

녹차향님의 연가 읽기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하네요.
글을 참...잘쓰세요.
소리샘님....녹차향님의 글로 겨울연가 되새길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잘읽고 갑니다.
평온한 밤 되세요.^^

김문형

2003.05.19 22:41:07

소리샘님.
오랜만에 댓글다네요.
유진이 얘기 감사해요...요즘 일이 있어서 책을 못읽고 있어요.
소리샘의 넉넉한 미소가 생각나네요....
정모때 오신다구요? 그때 뵐께요~~~

봄비

2003.05.20 01:20:45

첨으로 인사합니다.
일년내내 비하고 함께하는 촉촉한 여자 봄비입니다.
인사가 너무 거창하죠 ㅋㅋㅋ
점점 소리샘님의 아뒤가 낯이 설지 않는..
노래가 가슴 찡하게 울리네요.
정모때 우리 찐하게 인사해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427 [기사]`고품질’ 드라마는 안뜬다? [9] 그리운천계 2004-02-15 3028
426 저희가 부부싸움 좀 했거든요.......^^ [20] 꿈꾸는요셉 2004-02-17 3028
425 두분 4월 어떤 모습으로 조우하게 다시 될까요? [11] 주주~ 2004-02-17 3028
424 의미 [2] 앨피네~★ 2004-02-19 3028
423 궁금해서.... [3] 지우사랑해 2004-02-21 3028
422 날라리의 속삭임(4) [5] 날라리지우 2004-02-24 3028
421 지우언니 투표해주세요!!!!!!!! [3] 성희 2004-02-26 3028
420 ◈ 힘내라 힘!!! ◈ [1] 눈팅족 2004-02-28 3028
419 오늘의 밤인사 [8] LoW 2004-02-29 3028
418 휴 드디어토요일이군요^^ 출석! 카라 2004-03-06 3028
417 편안하다는 것... [2] 토미 2004-03-14 3028
416 [re]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우언니.... [4] 주주~ 2004-03-19 3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