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최지우
“사람다운 모습, 인간적인 모습이 좋지 않아요. 그러면 좀더 믿음이 갈 테고.” 최지우의 한 표를 원하시는 대선 후보께서는 필히 참고하셔야 할 거다. ‘대통령을 바꾸겠습니다’라고 거침없이 소리치는 부산 아가씨니 말이다. 그녀의 다섯 번째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영화 대통령 안성기와 호흡을 맞춘 세 번째 작품이다.

하필이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람. 인터뷰가 끝나면 부랴부랴 짐을 챙겨 부산행 차편에 몸을 실어야 할 형편이다. 아침나절부터 이래저래 분주하다. 아마도 내일 이맘때면, 그 분주함조차 면목없을 일정이 아가리를 벌리고선 달려들 게다. 며칠간은 해운대의 비린 바다 내음 벗삼아, 지린 땀 내음으로 영역 표시 꽤나 해야 할 것 같다. 은근한 설레임과 얕은 한숨이 맘 한켠에 나란히 자리한다. 나른한 창가의 햇살이 졸음 섞인 푸념으로 늘어지나 했더니, 외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이 이른 망상을 일갈한다. 이미 약속시간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무래도 9시 30분은 조금 이른 시간이었을까? 숨을 할딱이며 간신히 매달린 버스 구석자리에서, 이번에는 시계추를 부여잡고 안달이다. ‘딱 30분만 늦어라’ 하는 주문이 씹다만 밥알처럼 입안을 맴돈다. 쌀쌀맞은 날씨다. 그래도 채 식지 않은 땀방울을 추스르기엔 제격이다. 간간이 흔들리는 창문에 머리를 맞대니 바람이 묻어난다. 어느새 분침이 6자와 째깍 입을 맞춘다. 동화 속 괘종시계라면, 단 한번의 타종에 마법이라도 걸어볼 터. 무심하게 지나버린 시간이지만 건반처럼 긴 여운으로 조바심을 재촉한다.
‘약속시간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는 걸 보면, 대통령감은 아니지 싶다.’ 슬그머니 자책의 탄식을 흘려보내니 서서히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무슨 마술 같다. 그녀도 대통령감은 아니었으면 하는 심술궂은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냥 마법을 걸어볼까?
그런데 웬 대통령? 참, 3년 만에 출연한 그녀의 새 영화가 바로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다. 대통령과 국어교사의 ‘풋풋한’ 사랑, 은밀한 데이트가 감동을 자아낸다는 귀띔이다. 어릴 적 그녀의 꿈이 영부인이었으니, 어쩌면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말괄량이 처녀의 대통령 길들이기
짧은 다리의 느린 걸음을 어르고 달래 스튜디오로 헐레벌떡 뛰어든다. 낯익은 얼굴 몇몇이 제자리에 충실히 고정되어 있을 뿐 아직 여인의 향기는 소원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작가의 자랑이 이어진다. 스태프 전원이 티셔츠를 맞췄단다. 발단을 알 리 없는 그이에게, 위기를 넘긴 자의 안도의 미소를 얹혀둔다. 그래도 못내 미련이 생겨 핀잔 섞인 농으로 자족한다. 아침나절의 분주함과 조바심이 사르르 녹아 공간의 온기에 몸을 맡긴다.
마법에 걸린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매니저였나 보다. 지체된 시간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며 손끝으로 매니저를 가리킨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그려진 정다움이 누군가를 타박하는 투는 아니다. 마법사의 지팡이에 걸린 그 또한 머쓱한 웃음으로 대신한다. 첫 음감이 나쁘지 않다. 가히 ‘대통령도 바꿀’ 만한 웃음이다. 두 번째 건반은 어떤 소리가 날까? 정갈한 매무새에 반 옥타브 정도 들뜬 말투가 자연스레 허공에 오선지를 그리게 만든다. 음표 대신 기대감으로 점철된 물음표가 아침나절 차량의 행렬을 대신한다. 참다못한 궁금증에 사진작가의 힘찬 고함이 두 번째 건반을 기어이 두드리고 만다.
빠른 템포의 음악이 울리고 발끝에 힘이 실린다. 아직은 엇박자다. 그녀의 동선이 채 두 발자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기 경력 8년차에 접어들었다만, 아직 낯설음과 어색함이 굳이 제자리를 양보하지 못하나 보다. 사진작가가 슬며시 특유의 장난기어린 미소를 던져본다.
“오늘의 컨셉트는 척하는 거예요. 이쁜 척, 발랄한 척, 슬픈 척, 척척척!”
‘그럼 사진작가는 찍는 척?’ ‘척 하면 알아야지.’ 썰렁한 농담에 어색한 미소 한 번씩. 웃음소리를 따라 경직된 비늘들이 몸밖으로 떨어진다. 조금씩 발걸음이 가벼워지더니, 치맛자락을 잡고는 소녀처럼 팔짝팔짝 뛰어도 본다. ‘요염한 척’이라며 포즈를 취하고는 스스로도 어색한지 환하게 웃는다. 아무리 봐도 요염하다기보다는 말괄량이 처녀를 닮았다. 까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면서 척척 카메라를 받아들이는 품새가, 이제는 척하는 것 같지만은 않다.
“어렸을 때는 너무너무 말괄량이였어요. 성적표 보면 예술 쪽에 소질이 보인다는 얘기가 많아요, 책 읽을 때도 꼭 감정을 넣어서 읽고는 했어요.”
말괄량이 처녀의 대통령 길들이기? 그녀의 새 영화가 은연중 머릿 속에 그려진다. 급기야는 음악을 바꾸더니, 조금씩 어깨를 살랑거린다. 곱게 뻗은 손끝에서는 ‘젓가락 행진곡’마냥 경쾌한 울림이 찰랑거린다. 리듬은 이제 제 몸을 울림판삼아 3/4 왈츠를 그려낸다. 무용을 전공했다더니, 음률에 맞춰 고운 선이 넘실댄다. 음과 음의 사이, 정적과 정적을 잇는 절정의 순간, 그녀의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찾았다. 놓칠세라 잽싸게 낚아채는 사진작가의 탄성이 길게 이어진다.
12월, 다시 부르는 겨울 연가
두 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조아린 채 분산된 감정의 편린들을 채집한다. ‘슬픈 척’ 지그시 손끝에 와닿는 세 번째 건반이다. 초점을 잃은 눈빛의 여정은 알 수 없는 슬픔의 근원을 탐구한다. 그녀는 지금 심연의 깊은 숲에 잠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을 잃은 희락의 잔상은 한줄기 슬픔으로 화한다. 눈물이다. 변심이다. 리듬에 실어 세상의 온기를 호흡하던 코끝에는 토라진 여인의 마음이 자리한다. 감정의 선은 이미 타인의 시선을 저만치 앞질러버렸다. ‘기쁜 척’ 손끝에서 넘실대던 환희는 눈에 아리는 환영으로만 자리한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상(感傷)은 거센 폭풍을 헤쳐온 성숙의 상흔이다. 슬픔은 인고의 세월을 지나 작은 미소로 일렁이다 잦아든다. 낮의 한가운데 몸을 숨긴 빛의 위악처럼, 겨울의 문턱에서 겨울의 연가는 유진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뭘 그렇게 적으셨어요?”
촉촉이 젖어든 눈가는 채 마르지 않았다. 마주 앉아 어느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 조심스레 망설인다. 초롱초롱 빛나는 호기심은 눈물이 거짓이라 하고, 남겨진 증거는 그 천진함이 가식이라 한다. 마치 야누스의 얼굴처럼 슬픔과 환희는 등을 맞댄 채 공존한다. 하지만 이미 두 가지 표정을 잇고 있는 그녀의 실재를 체감한 터. 잘 갖춰진 대화의 감성보다, 무방비의 짧은 탄성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은 우연히 잡힌 표정일 뿐, 말이란 뱉고 나면 잊혀지고 마는 것을. 몇의 문자로 남겨진 그녀의 표정은 지난 시간의 진실을 꼭꼭 부여잡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늑장 취재를 빌미삼아 짐짓 부산 아가씨의 추억을 강요한다.
“저도 못 가서 너무 아쉬워요. 주말에 대만에 가야 하거든요. 금마장영화제 시상식 때문에….”
한류의 절정에 선 그녀는 이제 그네들에게 <겨울 연가>의 연인이자, <노화청춘>의 애인이다. 슬며시 꼬리를 내리니, 그녀의 추억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예인은 아니었어요. 유치원교사 그 정도였어요. 아이들을 좋아하거든요. 전 이상하게 어렸을 때는 야망이 작았던 것 같아요. 되게 소박했던 것도 같구.”
소녀시절의 꿈을 이야기하자, 발그레한 미소가 제멋대로 시간을 거슬러오른다. 어느새 살짝 띤 홍조는 소녀의 그때다.
“집도 부산이고, 지방이라서, 당연히 영화배우는 꿈도 못 꿨어요. 그런데 운이 좋았죠. 어릴 적부터 워낙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런지 좋아하는 선배들하고 마주치면 항상 그런 이야기 해요. 어렸을 때 팬이었다고.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고.”
꽉 쥔 조막손의 틈새로는 아직도 그 꿈들이 꼼지락꼼지락한다. 퐁당퐁당 던져놓은 말들이 낱낱의 건반과 조우하며 커다란 울림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그 첫 번째 물결에는 ‘이자벨 아자니’의 얼굴이 어우러지더니 금세 지워져버린다. 묘한 여운이 드리워진 마법의 거울에 두 번째 얼굴이 피어난다. 무척이나 뜻밖이다. 그녀의 첫 영화는 <박봉곤 가출사건>이다. ‘벙어리 정육점 주인’은 오히려 거짓말처럼 부유하며,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이다. TV의 사각틀 안에서 언제나 스산한 운명의 굴레와 다툼하던 그녀의 잔상은, 그 동안 쉽사리 그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저는 좀 속상한 게 드라마에서는 청순 가련 착한 여자 역을 많이 맡았잖아요. 영화에서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보다는 드라마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요. 내가 했던 드라마가 다 히트해서 그런가.(웃음)”
그러고 보니 영화에 있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장르의 집합이다. <박봉곤 가출사건> <올가미> <키스할까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 착한 ‘척’ 연기하는 배우 최지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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